최경의 출신(出身)을 살펴 보기 위한 아주 좋은 기록이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癸未, 1463년) 3월 병신조5)에 올라 있다. 그에 의하면 최경은 “안산군(安山郡) 염부(鹽夫)의 아들인데 어려서 그 아비를 따라 관(官)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즉, 최경은 소금을 만들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 났고, 그가 그 아비를 따라 관에 들어 갔다는 것은 그의 부친과 그가 한때는 관청(官廳)의 일(役)에 종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본관은 탐진이다.
최경(崔涇)1418년(태종 18년)에 출생 字가 사청(思淸) 또는 사청(四淸) 여청(汝淸)이며, 호는 근재(謹齋)이다. 세종조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벼슬은 별제에 이르렀다. 이공린(李公麟)의 영향을 받은 듯한 그의 그림은 인물화에 뛰어나 1472년(성종3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조 덕종의 초상을 그렸다. 성종은 최경의 그러한 공을 참작하여 당상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언관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가 1484년에 임명되었다.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최경(崔涇)은 세종-세조조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원화가(畵員畵家)이다. 이른바 이들은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1)로 칭하여 진다. 하지만 안견이나 강희안의 작품은 전존하고 있는데 비하여, 최경의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 및 고증된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최경의 예술세계에 대해 깊이있게 고찰해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최경의 경우와 같이 전존작품이 거의 없는 화가들의 인생과 예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문헌을 찾아 분석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경의 경우 안견이나 강희안에 비하여 언급한 문헌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를 연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으나, 조선초기의 삼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를 연구하지 않고서 세종-세조조의 회화사가 올 바르게 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최경에 대해 안휘준(安輝濬)교수의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2)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5세기에 활동했던 화원(畵員)으로는 산수의 제1인자였던 안견(安堅), 인물화의 제1인자 최경(崔涇),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린 배련(裵連)과 안귀생(安貴生)‥‥‥” (p.127)
“최경은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보면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과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전혀 없어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p.128)
“15세기의 화단에서 안견에 버금가는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선비화가 강희안과 인물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화원 최경일 것이다. 안견과 이 두사람은 족히 조선 초기의 3대가(三大家)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경은 북송대(北宋代) 이용면(李龍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 (p.135)
즉, 우리 회화사에서는 최경이 인물화에 능하다는 것으로, 그가 인물화만을 그린양 축소 평가한 감이 있다.
반면에 김용준(金瑢俊: 1904-1967년)은 그의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3)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초기에 있어서도 北畵風의 그림이 성행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남북화를 혼합한 화풍과 純南畵系의 그림도 행하였다. 安堅 崔涇 姜希顔 李上佐 李楨 金明國 같은 이는 북화산수로 유명하였고‥‥‥” (p.213)
"초기의 三大家는 安堅 崔涇 姜希顔이니‥‥‥, 崔涇은 安堅과 함께 명성이 높은 화원으로 산수 외에 인물도 入神한 작가이며 나이 70이 넘도록 筆力이 쇠하지 않았다 한다. ‥‥‥(중략)‥‥‥ 이 三大畵家는 中國 北畵派의 거장인 馬遠과 夏珪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들이나 세 사람의 특색은 각기 다르다.” (p.214)
즉 김용준은 최경이 “산수외에 인물도 입신한 작가”로 일단은 상당히 높여 평가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최경의 인생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崔涇의 本貫과 家門, 그리고 生存年代
최경의 자는 사청(思淸), 사청(四淸), 여청(汝淸) 등4)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다. 그는 화원(畵員)으로서 도화원(圖畵院) 별제(別提)를 지냈다.
그의 본관은 탐진(耽津)인데, 탐진은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百濟)의 동음현(同音縣)이었고 신라(後期新羅)의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쳤으며, 고려때는 영암(靈岩)과 장흥(長興)으로 나뉘어 이속되었다가, 1417년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康津)으로 고쳤다. 즉 탐진은 지금의 강진 일부를 신라 경덕왕 이후 고려초까지 한때 부른 호칭인 것이다.
탐진최씨의 시조는 고려 인종(仁宗)때 이자겸(李資謙: ?-1126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功臣)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명문(名門)이 고려말에 이르러 국운의 쇠퇴와 함께 기울게 된다.
최경의 출신(出身)을 살펴 보기 위한 아주 좋은 기록이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癸未, 1463년) 3월 병신조5)에 올라 있다. 그에 의하면 최경은 “안산군(安山郡) 염부(鹽夫)의 아들인데 어려서 그 아비를 따라 관(官)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즉, 최경은 소금을 만들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 났고, 그가 그 아비를 따라 관에 들어 갔다는 것은 그의 부친과 그가 한때는 관청(官廳)의 일(役)에 종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천민출신(賤民出身)임을 이야기하여 준다. 그러던 그가 도화원 생도가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아직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최경의 생존년대(生存年代)가 전혀 규명(糾明)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종실록(成宗實錄)> 권 244, 성종21년(1490년) 9월(丙子) 20일조와 27, 28일조를 보면 화원으로 사과(司果)직에 있는 최경의 노승직(老陞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이는 고희(古稀)의 노인들에게 내리는 가자(加資)를 의미하는 것인데, 당시 최경은 정3품인 절충(折衝)에 가자된다6). 따라서 이를 역산(逆算)하여 보면 최경은 1420년경에 태어났고, 그는 만 70세이던 1490년에도 화원으로서 현직에 근무하고 있었음을 보아 그는 1490년 이후에 사망하였다. 이는 그가 “나이 70에 이르도록까지 눈이 밝아 능히 그림을 그렸다”는 이육(李陸: 1438-1498년)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여 준다7). 이렇게 보면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는 안견(1418년) 강희안(1419년) 최경(1420년) 순으로 연년생(連年生)이 된다.
圖畵院 生徒를 거쳐 畵員으로
앞서 언급한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癸未, 1463년) 3월 병신조에 의하면 최경은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소뿔로 땅에 인물이나 당나귀, 말 등의 모습을 그렸는데, 제법 생기가 있어 촌부(村夫)들이 최경은 그림으로 뛰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도화원(圖畵院)의 생도(生徒)로 뽑혀 그 업에 정진하였고, 여러 차례 각별한 은전을 입어 5품직에 한정되는 화원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최경이 그림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으므로 도화원의 생도로 뽑혔으며, 후에 화원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세종때(1419-1450년)는 도화원(圖畵院) 생도(生徒)를 뽑기 위한 시취제도가 있었고, 또한 도화원 생도를 거쳐 화원이 되는데도 역시 시취(試取)를 거쳐야 했다8).
최경과 안견은 세종조부터 활동한 화원이다. 최경이라든가 안견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1440년대초에 도화원의 화원으로 출세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세종조에는 화원의 직책을 맡아 출사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30세이전이어야 했다. 위에서 고증하였지만 최경은 142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8품직인 도화원의 대교(待敎)를 거쳐 화원(畵員)이 된 이후에, 세조조에 이르러 화원화가(畵員畵家)로서의 최대의 영예인 어진화사(御眞畵師)가 되며, 5품직에 한정되는 화원으로서는 파격적(破格的)으로 정4품 호군(護軍)을 거쳐 말년에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제수(除授)된다. 즉 최경은 조선시대에 화원으로 최고의 품계(品階)를 가진 가장 출세(出世)한 화가인 것이다. 물론 이는 그가 어진을 그린 공로로 주어진 것이므로, 그가 화원화가로서 가장 출세하였다고 하여 그가 회화의 전반에 걸쳐 높은 기량을 가졌다고는 단정할 수가 없다.
崔涇과 御眞, 그리고 山水
최경을 언급한 문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현(成俔: 1439-1504년)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보이는 다음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이다.
“‥‥‥其後安堅崔涇齊名 堅山水 涇人物 皆入神妙‥‥‥涇晩年亦畵山水古木 而當讓於堅矣‥‥‥”
“‥‥‥그 후에 안견과 최경이 이름을 날렸는데, 견은 산수에 경은 인물에 신묘의 경지에 들었다‥‥‥ 경이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렸는데 당연히 견에게는 물러나야 한다‥‥‥”
이 문헌으로 하여 최경은 인물에 능하였고 산수는 말년에 가서야 시도한 듯한 오해가 우리 미술사학계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지난 1994년 안견논쟁시(安堅論爭時)에 세종조인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어진(御眞)이라등가 왕실의 초상화 제작에 안견이 깊이 간여(干與)되었음이 주장된 바 있고, 그 한 증거로 1442년에 안견이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9).
산수화가로 특정(特定)을 지었던 안견이 여러 왕들의 어진(御眞)과 광평대군, 안평대군 등의 초상을 그의 창작초기인 1442년에 그리는 등 사조(寫照) 능력이 상당했음을 미루어 볼 때, 최경 역시 그의 창작초기부터 산수화를 그렸고, 그의 산수화 수준은 상당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용재총화>에서의 이러한 평가는 당대에 선호되었던 회화에 대한 시각(視覺)에서 화가 각자의 특장점(特長點)을 비교 언급하여 만들어진 상대적인 평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최경은 안견에 필적(匹敵)하는 화가였으나 그 장기(長技)는 인물화에 있었던 것이다.
안견은 조숙형(早熟型)의 천재화가이나, 최경은 만성형(晩成型)의 노력화가이다. 이 두사람이 한시대에 활동하였던 만큼 상호간은 최대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경쟁관계를 의식하여 한 세대(世代) 이후의 사람들이 산수는 안견, 인물은 최경하는 식의 대비적(對比的)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었음이 분명하다10).
안견은 안평대군의 몰락과 함께 도화원에서의 활동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다. 따라서 세조초에 이르러서는 어진(御眞)이라든가 왕실 초상화 도사(圖寫)의 주도권(主導權)이 최경에게로 돌아 가며, 안견은 산수화를 위주로 그린다. 이를 보면 산수는 안견, 인물을 최경하는 식의 고정관념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훨씬 이후에 최경이 덕종의 어진을 그린 세조초를 전후로 하여 발생한 관념으로 보인다.
현재 최경의 초상화 작품은 알려진 것이 없다. 원래 초상화란 그린 작가보다 그려진 인물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특정 초상화를 그린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경이 세조초부터 어진과 초상화 제작을 주도하였다면 의당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그려진 작자미상의 초상화들 가운데는 최경의 작품이 끼여 있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초상화가와 전존하는 초상화를 살펴 본 결과 아래와 같이 정리되었다11).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초상화가
1) 안견 : 1442년 안평대군과 광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렸다.
2) 최경 : 1456년 9월이전에 최경과 안귀생은 덕종의 어진 초본을 그린다. 이 초본은 1472년본 덕종어진을 최경과 안귀생이 다시 그리는데 바탕이 된다. 또한 1472년에 최경 안귀생 배련등이 세조와 예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함께 그린다.
3) 안귀생 : 전항의 ‘최경’ 참조.
4) 배련 : 전항의 ‘최경’ 참조.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중요 전존 초상화
1) 최덕지의 영정 : 1445년 이전.
2) 신숙주의 영정 : 1445년경.
3) 오자치의 영정 : 1476년경.
4) 손소의 영정 : 1476년경.
5) 장말손의 영정 : 1482년 이후.
이상의 탐색을 통하여 볼 때 <최덕지의 영정>과 <신숙주의 영정>은 안견의 작품일 가능성12)이 크며, <오자치의 영정>과 <손소의 영정>은 최경을 위시한 안귀생 배련 가운데 한 두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조선조의 초상화를 살펴 보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초기로 전해져 내려온 전신사조법은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화풍면에서 한 변화를 격게 된다. 이에 대해 조선미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초상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13).
“② 제2단계의 공신도상
제1단계의 도상형식은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그 중 몇 가지 특징은 퇴화되어 버리고, 새로운 표현양식이 이에 대체되어 점차 나타나서 15세기 말엽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이를 제2단계의 功臣圖像群으로 묶어서 고찰해 볼 수 있는데, 공신칭호로서는 靖難功臣 佐翼功臣 敵愾功臣 翊戴功臣 佐理功臣像이 포함되며, 현존하는 화상으로서는 申淑舟像을 효시로 하여 張末孫 吳自治 孫昭像이 이에 속하는데 모두 원본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안견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년)은 “안견은 전신법에 있어서 동국(東國)의 오도자(吳道子)가 되었네”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안견이 초상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있어 한 전형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초기 초상화의 한 전형은 최경에 의하여 발전된다. 더욱이 최경은 70세때(1490년)도 눈과 필력이 쇠하질 않아 화원으로서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1420년생이므로 현존하는 <오자치의 영정>과 <손소의 영정>이 그려진 1476년은 그의 57세때이고, 이 시기는 그가 능히 이 초상화들을 그릴 수 있었던 때이다. 반면에 안견은 1470년을 전후로 한 시기 이후에는 작품을 남긴 것 같지가 않다. 안견의 이러한 공백기에 최경은 산수화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崔涇畵風의 類推
문헌에 의하면 최경은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삼소도>를 그린바 있다. 그런데 조선초기에 일본으로 간 “문청”과 조선중기의 김명국 역시 <삼소도>를 그린바 있다. 최경의 <삼소도>가 이들의 <삼소도>와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나는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3-4월호에서 “문청”을 다루며 언급한 바 있듯이 “문청작 <虎溪三笑圖>는 <三笑圖> 또는 <三敎圖>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세 노인은 儒佛仙 三敎의 學者와 僧侶, 道士를 의미한다. 그 세 노인이 마주하여 破顔大笑를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印象的‥‥‥ 마치 삼교의 道가 모두 하나로 歸一한다는 自覺에서의 破顔大笑‥‥‥ 畵讚하나 붙어 있지 않은 이 작품에서 무언가 口頭禪的인 의미가 들어 있”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화가 연담 金明國 역시 <호계삼소도(17.0x10.7Cm., 견본수묵)>를 그린바 있는데14), 김명국의 작품은 문청의 작품과 여러면에서 상통‥‥‥, 특히 김명국의 작품에 그려진 서 있는 세 노인의 복식을 보면 이는 문청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기 유불선 삼교의 학자와 승려, 도사를 의미”하며, “다만 문청의 작품과 김명국의 작품에 다른 점이 있다면 문청의 작품에는 배경이 없는데 비하여, 김명국의 작품에는 浙派畵風으로 배경에 길 위에서 談論하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15)”
반면에, 박팽년의 <삼소도서(三笑圖序)>에 의하면 최경의 <삼소도>는 조맹부(趙孟부: 1254-1322년)가 가지고 있다가 후일 안평대군의 수집품이 된 이공린(李公麟: 1049-1106년)의 <삼소도>를 모사한 것이라 한다. 즉, 최경의 <삼소도>는 그 원류가 북송(北宋)의 이공린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최경의 <삼소도>는 세 노인이 모여 앉아서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문청의 <삼소도>의 경우와 같이 삼교의 세 노인일 가능성은 크지만 아직 이를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에 유불선의 도가 결국에는 하나로 귀일(歸一)한다는 사상16)이 동양삼국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이공린이나 최경의 <삼소도> 역시 삼교의 노인을 그렸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또한, 다음 항목 “최경의 전칭작품”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최경은 유송년의 화법에 따라 세종조에 <채희귀한도>란 人物山水를 그린바 있다.
한편, <용재총화>에 “涇晩年亦畵山水古木”이라 하여, 최경이 마치 만년에 이르러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린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성현이 알기에 경이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렸다는 말이지, 실제로 최경이 만년에 이르러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리기 시작한 것 같지는 않다. 최경 역시 다른 도화원 생도들과 마찬가지로 산수를 우선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회화의 여러 분야를 고루 익히고 역량을 키운 다음에야 배우는 우리 전통회화(傳統繪畵)의 가장 어려운 분야이고, 반면에 산수화는 그림을 배울 때부터 우선 익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수는 자기 해석대로 재구성하여 그릴수 있는 그림인데 비하여, 전통회화에서 초상화는 자기 해석대로 재구성할 수가 없는 이유로 하여 대개의 초상화가들은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리기가 힘든 초상화는 가급적이면 기피하였고, 이는 그들이 창작한 초상화로서의 수작은 대개가 40-50대에 창작한 작품인 결과17)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용재총화(용齋叢話)>를 쓴 성현은 당시 회화의 보편적 관점을 쓸 수 있었을 뿐 예림(藝林)에서 구체적인 화론(畵論)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성현이 언급한 최경이 만년에 이르러 산수와 고목을 그렸다는 것은 초상화가로 알려지고 있던 그가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리는데 치중(置重)하였으므로 성현은 그가 만년에 와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린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찰에서 볼 때 김용준이 언급한 “崔涇은 安堅과 함께 명성이 높은 화원으로 산수 외에 인물도 入神한 작가이며”라는 것은 최경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하겠다. 다만 안견이 산수화 창작의 기량에서 최경을 앞섰고, 최경은 초상화의 창작 기량에서 안견보다 앞섰던 것이다. 안견이 초상화에 있어 최경보다 기량이 뒤졌다고 해서 그가 조선초기의 다른 화가들 보다 초상화를 못 그렸다고 볼 수가 없듯이, 최경이 산수에 있어 안견보다 기량이 뒤졌다고 해서 그가 15세기의 다른 화가들보다 산수를 못 그렸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 최경의 산수화가 전존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는 당연히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이 즐겨 구사한 화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러한 화풍에는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고려화(高麗化)된 마하파(馬夏派) 화풍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18).
그리고 당대의 강희안이 절파화풍(浙派畵風)을 묘사한 것을 볼 때 최경 역시 절파화풍도 구사하지 않았나 유추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전칭작품 <적벽도(赤壁圖)>가 있는데, 안휘준교수는 이를 “산수화보다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에 의하여 그려진” 작품일 것이라고 주장19)한 바 있다. 이는 다분히 최경을 의식한 주장인 것인데, 안견도 초상화를 그린바 있으므로 인물에 능하였다고 보아야 하므로 <적벽도>의 작가로 안견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적벽도>의 주제는 거친 적벽의 거센 물살을 타고 유람하는 인물에 있으므로 이 작품에서의 산수와 격랑은 거칠게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유섭이라든가 최순우는 구전(口傳)에 따라 적벽도를 안견작으로 인정하였다. 어쨌든 <적벽도>의 가치는 우리는 이 작품에서 15세기 중후반에 유행된 절파화풍의 일면을 엿 볼 수가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적벽도>에서 보여주는 절파화풍은 중국 명대(明代)의 화가 대진(戴進)이 구사한 절파화풍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어 진다.
한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사가집(四佳集)>에는 최호군화(崔護軍畵)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제시(題詩) 십수(十首)가 있는데, 이는 최경이 <청산백운도>란 청록산수(靑綠山水)를 그린바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호군이란 정4품 무관직(武官職)인데, 때로는 화원들에게 품계로 주어지기도 하였다. 서거정은 최경과 거의 나이가 비슷한 한 시대의 인물로서 그가 최경을 정4품인 호군으로 칭한 것을 보면 그가 <청산백운도>의 제시를 지은 때는 최경이 정3품 당상관직에 제수되기 이전인 성종초(1470년대초)로 보인다20). 이는 최경의 <청산백운도>가 최경의 50대 작품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최경의 <청산백운도>는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던 마하파 화풍을 원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유추된다.
崔涇의 傳稱作品
안휘준교수의 저서 <안견과 몽유도원도> p.64의 註66에 의하면 일본에 최경의 관지(款識)가 들어 있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의 전존사실이 아래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日本에 그의 이름이 款署되어 있는 <白衣觀音像>이 전해지고 있음을 奈良 大和文華館의 吉田宏志 學藝部次長이 보여 준 사진을 통하여 알았으나 현재로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1997년 3월 26일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으로 요시다(吉田宏志)선생을 찾아가 최경의 관지가 들어 있는 <백의관음상>의 존재를 확인하여 보았다21). 그런데 이 글에서 <백의관음상>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증정고화비고(增訂古畵備考)>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경의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22)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증정고회비고>에 채록된 <채희귀한도>의 기록은 <백의관음상>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기록 옆에 <채희귀한도>에 기록된대로 “耽津崔涇 待敎”라 쓰고 그림에 찍혀진 “耽津崔氏”와 “思淸” 등 두 개의 낙관을 그려 넣었다.
또한, 이 문헌을 미루어 보면 최경의 <채희귀한도>는 견본채색의 큰 횡축으로 된 세밀히 묘사한 조선화로서, 유송년 등 원말(元末) 화가의 화풍 즉 북화풍(北畵風)과 유사(類似)함을 알려 준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채희귀한도>는 <증정고화바고>의 편자 조강흥정(朝岡興楨)이 확인한 기묘년(己卯年: 1879년) 윤4월 28일 이후의 전존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化館)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명초(明初)의 <문희귀한도권(文姬歸漢圖卷)>으로부터 최경의 <채희귀한도>의 모습을 상상해 볼수가 있다. 대화문화관의 <문희귀한도>는 채문희(蔡文姬)가 한나라로 귀환하는 18장면을 보여주는 견본저색(絹本著色)의 두루마리(橫軸) 그림으로, 그 크기는 25.5×1199.9cm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최경의 <채희귀한도>는 대화문화관에 소장된 중국 명초의 <채희귀한도>와 같은 형태로 --산수간(山水間)에-- 그려진 행렬도 형식의 두루마리(橫軸)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최경이 어느 시기에 그린 것인가?
그 탐색의 실마리는 <증정 고화비고>에 채록된 최경이 자필로 관지한 “耽津崔涇 待敎”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대교(待敎)란 예문관(藝文館)의 정8품 벼슬을 의미한다. 즉 “耽津崔涇 待敎”라 씌인 작품은 그가 도화원의 정8품직에 있었던 시기에 그린 작품임을 의미한다.
최경에 대한 왕조실록상의 첫 기록은 <세조실록> 권2, 세조1년(1455년) 12월 무진(戊辰) 27일조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세조는 1455년 12월 27일 의정부에 전지(傳旨)를 내여 최경 등을 정5품의 사직(司直)에 임명한다. 따라서, 이를 보면 “耽津崔涇 待敎”라 쓴 최경의 작품은 그가 세종조에 도화원을 입사한 이후 정5품의 사직에 임명되기 이전에 대교(待敎)로 있을 때 그린 작품, 즉 그의 30대 전반기의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최경이 이미 세종조에 인물산수(人物山水)를 그린 바 있음도 입증하여 준다.
현재 최경의 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백의관음상>만이 전존하고 있다. 어쨌든 대화문화관의 일본내에 전존하고 있는 조선회화들에 대한 조사 파일을 보면 <백의관음상>은 1979년 5월 4일 중천방소(中川邦昭)씨가 사진을 찍은 것으로 되어 있고, 당시의 소장가는 미술가 전중임(田中 稔)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작품의 크기는 69.8×33.5 cm이고 견본수묵(絹本水墨)이다.
<백의관음상>의 사진을 통하여 검토해 보건대 이 작품은 인물의 묘사에서 매우 개성이 강하여 크게 인상에 남는다. 사진에 찍혀진 규칙적으로 나타나 있는 좀이 먹은 흔적을 보건대 이 작품은 족자로 보존되어 내려왔다.
작품의 중앙 오른쪽 하단부에 백의를 한 관음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버드나무가지가 꽃혀져 있는 정병이 놓여진 바위에 엎대어 작품의 왼쪽 상단부에서 떨어지는 폭포를바로보고 있다. 후광으로 뒷 바침되고 있는 관음의 얼굴은 대부분의 <백의관음도>가 근엄한 무표정인데 비하여 매우 인간적(人間的)이며 사실적(事實的)인 고요한(靜的인) 표정을 짖고 있는데, 그 아래 작품의 왼쪽 하단부에는 격랑(激浪: 世波)을 그려 넣어 화면에 동적(動的)인 긴장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또한 백의관음은 해변가 벼랑밑 공간(空間)에 들어가 있는 감(感)이 들도록 작품의 왼쪽 상단부에서 백의관음이 기대어 있는 바위의 딋편까지 작은 나뭇가지와 풀을 그려 넣어 격랑과 육지를 대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의 백미는 관음의 인간적이며 사실적인 얼굴 표정과 이 작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상태가 대비되어 조화를 이루는 구도에 있다.
그리고 이 <백의관음상>에는 <채희귀한도>와 마찬가지로 “耽津崔涇 待敎”라 관지(款識)가 되어 있는데, 그 필적마저도 <증정 고화비고>에 채록된 것과 거의 같다. 물론 이 작품의 원본(原本)을 보고 실견할 기회가 주어지기 이전에는 이 작품이 그려진 회견(繪絹)의 특성이라든가 관지(款識)의 진실성 여부를 --안휘준교수의 언급대로 최경의 작품인지를--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가 없다.
물론 현재로서 이 작품이 최경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기존적인 일본인들이 그린 <백의관음도>24)와는 전혀 다른 감을 주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최경의 초년 작품일 확율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세종과 세조는 조선조의 어느 임금보다도 숭불(崇佛)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화원이 불교를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최경 스스로도 자신이 “어용(御容)과 불상(佛像) 인물(人物)을 모두 다 그린 것이 다른 화원들과 다르다25)”고 이지(李?)26)에게 말한 바 있다.
앞으로 현재 소장처 미상의 이 작품 실물이 공개되어 연구될 수가 있기를 희망한다. 설사 이 작품을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일각(一角)에서 최경의 전칭작품으로 분류를 한다고 해도 이 작품은 틀림없는 조선초기의 <백의관음도>이기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세종조에 있어 최경은 화원화가로서의 위치가 안견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 의하여 몰려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도화원에서 안견의 입지는 위축되고 그가 부각(浮刻)되기 시작한다. 최경은 세종조에 도화원 생도가 되었고, 초년부터 산수와 인물을 모두 그렸으며, 어용(御容)과 불상(佛像) 인물(人物) 등을 고루 그렸다.
그러나 세조조에 이루어진 어진이나 왕족 및 공신의 초상화 도사를 그가 주도하게 됨에 따라 한 세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의 장기(長技)가 초상화인 것으로 비쳐졌다. 실제로 최경은 15세기 후반부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이나, 그는 산수에도 안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히 능하였다.
최경의 인생과 예술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우리 민족의 조선초기 회화사는 올 바로 정립될 수가 없다. 안휘준교수의 지적대로 최경의 “인물화가 백묘화(白描?)로 뛰어났던 북송(北宋)의 문인화가 이공린과 나한도(羅漢圖)를 잘 그렸던 유송년(劉松年)의 화풍을 수용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논술에서 최경은 도화원에 근무한 초기부터 인물산수를 그렸음을 규명하였으며, 그는 당대의 안견이라든가 강희안이 구사한 산수화풍을 구사하였을 것으로 유추해 보았고, 또한 작자미상의 초상화 가운데 그의 진적(眞跡)일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추려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면에서의 탐색으로 볼 때 최경의 작품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 사이에 전존하고 있으나 지나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을 결코 지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최경에 대한 회화사적(繪畵史的)인 재인식(再認識)과 조선초기 전존작품(傳存作品)의 탐색(探索)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고 느껴진다.
이 탐색의 끝에 부치고 싶은 말은‥‥‥, 최경은 인격적(人格的)으로 고상(高尙)한 품격(品格)을 갖추지 못하여 때로는 매우 천박(淺薄)하게 행동(行動)하였고, 이 때문에 지탄(指彈)의 대상(對象)이 되었다27)한다. 그것이 최경의 예술을 탐색하면서 갖게 된 가장 아쉬운 점이다. (1997.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