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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최씨 본관의 유래
수성최씨(隋城崔氏) 시조(始祖) 휘 영규(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姓)이 김씨(金氏)였다.
그리고 諱 영규(永奎)는 김부(金傅-경순왕)의 13세손이라고 ‘정사보(丁巳譜)’에 기록하고 있다. 휘 영규(崔永奎)는 고려 충렬왕 28년에 수성최씨(隋城崔氏)로 사성(賜姓)되었다. 그리하여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에도 경순왕손(敬順王孫) 영규위수성최씨(永奎爲隋城崔氏)라 기록되어 있다. 또 영자(永字)로부터 삼수변(三水邊) 단자항렬(單子行列) 사자(士字)까지 본성(本姓)이었던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같은 항렬(行列)로 3대(代)를 내려오다 시조의 손자인 원개(元凱) 형제도 처음 이름을 사자항렬(士字行列)을 따르다 뒤에 개자항렬(凱字行列)로 고쳤다.

수성최씨(隋城崔氏)는 ‘충신(忠臣)은 두 왕조(王朝)를 섬기지 않는다’는 가르침에 따라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5세손 최경(崔涇)때 비로소 입사(入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수성최씨(隋城崔氏)가 오늘에는 60,000명이 넘는 저성(著姓)이지만, 상기(上記)한 바와 같은 연유에서 조선조 초기에는 종문(宗門)활동이 뚜렷치 못했던 것 같다. 수원(水原, 수성(隋城))에 예부터 양최(兩崔)가 있었으니 수성최씨(隋城崔氏)는 시조(始祖) 영규(永奎)가 수성백(隋城伯)으로 봉백(封伯)됨으로써 본관(本貫)을 수성(隋城)으로 하여 래최(來崔)라고 하고, 수성최씨(隋城崔氏)보다 먼저 수원(水原)에 자리잡은 상저(尙翥)·루백(婁伯)을 시조(始祖)로 하는 원최(原崔)가 있는 바 일부 문헌(文獻)에 수성(隋城)을 수원(水原)으로 기록(記錄)하고 있음은 양최(兩崔)를 혼동오기(混同誤記)한 것으로 추측된다. 심지어 ‘국조방목(國朝榜目)’중에 본관(本貫)이 수원(水原)으로 등록된 분이 16명이나 된다고 수성최씨(隋城崔氏) ‘정사보(丁巳譜)’에 기록하고 있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一帶)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彛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王)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自請)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 (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王)이 가상(嘉尙)히 여겨 1302년(충렬왕 28) 호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수성(隋城)은 수원(水原)의 고호(古號)이며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 시대에는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다.
고려 성종 때 한남, 수성(隋城)이라 명명했다. 1271년(원종 12)에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로 고쳤으며, 1310년(충선왕 2) 수원부로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郡)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한 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의 2등 군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시조 휘 영규의 아들 휘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휘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嘗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휘 원개(崔元凱)가 공민왕때 시무(時務)18책(策)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후학배양(後學培養)에 힘썼다든지, 아우 최문개(崔文凱)도 기관(棄官), 산곡(山谷)에서 자적(自適)하였던 것이 보기가 된다.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養公派)․가산공파(嘉山公波)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

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조공신)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로고디어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휘 유림(有臨)의 아들 휘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휘 윤신의 손자 휘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將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봉암공(鳳巖公) 휘 원개(元凱)의 증손(曾孫) 유용(有容)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낸 윤종(潤宗)의 아들 언호(彦浩)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정현(廷顯)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道水軍節制使)가 되어 당대에 뛰어났다.

그 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휘 보한(輔漢)이 있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충원(忠元)과 부윤을 지낸 정원(貞元)이 있으며, 욱(煜)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고성 군수(固城郡守)와 청송(靑松)․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형록(亨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죄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종부령(宗簿令) 문개(文凱)의 후손에서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휘 효건(孝騫)이 대표적이다. 효건은 1608년(선조 41)에 상고(尙古)의 아들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성품 이 강직하고 아부를 하지 않아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시와문장에능하여저서(著書)를 많이 남겼으며「하산집(何山集)」이 유명하다.

호남구보(湖南舊譜)인 ‘을묘보(乙卯譜)’에 보면 호남파의 중시조이고 중직대부 경차관을 지낸 최순은 벼슬길을 버리고 금성(錦城-나주)의 처가향(妻家鄕)에 퇴거(退去)하여 세거지(世居地)의 터를 잡게 되어 자손이 번연하게 되고 출사자(出仕者)가 늘어났다.

제용감정(濟用監正) 최낙궁(崔樂窮), 현감(縣監) 최희열(崔希說), 형조좌랑(刑曹佐郞) 최희민(崔希閔), 홍양현감 최희량, 예빈사직장(禮賓寺直長) 최찬(崔纘), 양암(羊巖) 최형(崔衡),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최창국(崔昌國), 정언공(正言公) 최달한(崔達翰), 효자공(孝子公) 최진한(崔振翰) 같은 이가 호남계(湖南系)의 후손들이다. 시조 최영규(崔永奎)가 학덕(學德)으로 수원백성(水原百姓)에게 효제지도(孝悌之道)를 심었다함은 알려진 바이거니와, 그런 혈통 때문인지 수성최씨(隋城崔氏) 중에는 기절(氣節)을 존숭한 인물들이 특히 눈에 띈다. 휘 원개(崔元凱)가 공민왕때 시무(時務)18책(策)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고, 아우 휘 문개(崔文凱)도 기관(棄官), 산곡(山谷)에서 자적(自適)하였던 것이 보기가 된다.

외란(外亂)을 맞아 목숨을 바쳐 충국(忠國)한 인물도 많다. 임진왜란 때 전라수사(全羅水使)를 지낸 최희효(崔希孝),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최진한(崔鎭漢)·현감(縣監) 최희열(崔希說)·무숙공(武肅公) 최희량(崔希亮)같은 이가 그런 분이었다. 희량(希亮)은 참봉을 지낸 영(瀛)의 손자로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774년(영조 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공(公)의 임난(壬亂) ‘파왜보첩(破倭報捷)’은 1979년 정부(政府)에서 보물(寶物) 660호(號)로 지정하여 나주 종손(羅州宗孫)이 이를 보관(保管)하고 있다.(지금은 국립나주박물관에 보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창국(昌國)은 1750년(영조 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거쳐 능참봉(陵參奉)을 역임했으며, 규한(逵翰)은 1780년(정조 4) 등제한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내 수성 최씨 가문을 빛냈다. 또한 조선조(朝鮮朝)에서 많은 공신(功臣)을 배출하였는데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 최유림(崔有臨),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 최보한(崔輔漢), 인조 때 진무공신(振武功臣) 최응일(崔應一) 등이 있다.그리고 한말(1907) 의병으로 순국한 최택현(崔澤鉉), 광현(匡鉉), 병현(炳鉉), 윤용(潤龍)이 독립유공자로 표창되었으며 일제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동한 최태주(崔泰周) 또한 독립 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