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 소개
역사 속 인물 | 수성최씨 역사 > 역사 속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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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중요(重要) 인물(人物)
- 최흡(崔洽) : 시조(始祖) 영규의 아들로 고려(高麗) 충렬왕조(忠烈王朝)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름.
- 최원개(崔元凱) : 흡의 아들로 고려(高麗) 공민왕조(恭愍王朝)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은퇴 후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냄.
조선시대(朝鮮時代) 중요(重要) 인물(人物)
- 최경(崔涇) : 원개의 손자로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됨.
- 최유림(崔有臨) :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조 조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충적개공신 3등에 훈호되고 가선대부 수성군에 봉해지는 동시에 오위장이 되었습니다. 사망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양(安襄)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종2품으로 위장이라고도 한다. 정원은 12명이며 타관이 겸했다. 5위는 1451년(문종 1)에 설치되었는데, 각 위마다 5부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다. 또 위마다 위장을 두었으며 그 아래 부장(部將)·통장(統將)을 설치했다. 그러나 실제로 5위장은 5위의 군사편제와는 무관한 별도의 관직으로, 왕이 낙점하여 선발했다. 궁내에 입직하여 5위 소속의 군사를 분정받아 순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외에도 조정에 연회나 경축행사가 있을 때 소속군사를 거느리고 궁성마다 정렬하기도 했다. 이처럼 5위장은 왕 주변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관직이므로 대군이나 임금의 신임을 받은 관료가 임명되었다. 1일 3명씩 차례를 나누어 입직하며 3일 만에 교대했다. 입직했을 때는 동·서·남 3곳을 나누어 각각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대궐과 도성의 내외를 순행했다. 왕의 궁궐 밖 행차를 수행할 때에는 휘하장교와 군사에 대해 태형(笞刑) 이하의 범죄를 바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그 이상의 범죄는 왕에게 보고하여 척결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차비노(差備奴)는 20명을 배정해주었다. 조선 후기에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3품직으로 격하되었고, 2명은 조사위장(曹司衛將)이라고 하여 문관을 임명했다. 뒤에 1명은 반드시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또 1명은 문음무관(文蔭武官)에서 통차(通差)했다. 〈대전회통〉에는 3명을 증원하여 15명이 되었다. - 최유용 : 가산군수
- 최유항 ; 안주목사
- 최윤신 : 사헌부 집의 - 최언호 : 호조참판 - 최진창 : 병마절도사 - 최진한 : 경상도 병마절도사 - 최정현(崔廷顯) :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都水軍節制事)에 이름. - 최윤명 : 직산군수 - 최보한 : 우찬성 - 최정윤 : 전주부윤 - 최정운 : 충청도 병마절도사 - 최효건 : 좌승지 - 최희량(崔希亮) :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해 정유(丁酉)재란에 일어나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전사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갔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최 결 : 한성판윤 - 최사기(崔賜起) : 조선 단종, 세조조의 무신으로 삼군진무(三軍鎭撫)와 웅천현감 겸 웅천병마절제사(熊川縣監 兼 熊川兵馬節制使)를 역임함. - 최형록(崔亨錄)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됨. 수성최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수성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영규계의 시조(始祖)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姓)이 김씨(金氏)였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고 남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一帶)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彛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王)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自請)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 (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王)이 가상(嘉尙)히 여겨 1302년(충렬왕 28) 호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한편 거경계(居涇系)는 고려 때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낸 거경(居涇)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수성(隋城)은 수원(水原)의 고호(古號)이며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 시대에는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다. 1271년(원종 12)에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로 고쳤으며, 1310년(충선왕 2) 수원부로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郡)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한 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의 2등 군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시조 영규의 아들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嘗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養公派)․가산공파(嘉山公波)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 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조공신)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로고디어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유림(有臨)의 아들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윤신의 손자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將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봉암공(鳳巖公) 원개(元凱)의 증손(曾孫) 유용(有容)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낸 윤종(潤宗)의 아들 언호(彦浩)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정현(廷顯)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道水軍節制使)가 되어 당대에 뛰어났다. 그 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보한(輔漢)이 있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충원(忠元)과 부윤을 지낸 정원(貞元)이 있으며, 욱(煜)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고성 군수(固城郡守)와 청송(靑松)․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형록(亨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죄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종부령(宗簿令) 문개(文凱)의 후손에서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효건(孝騫)이 대표적이다. 효건은 1608년(선조 41)에 상고(尙古)의 아들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성품 이 강직하고 아부를 하지 않아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시와문장에능하여저서(著書)를 많이 남겼으며「하산집(何山集)」이 유명하다. 거경계(居涇系)의 후손 희량(希亮)은 참봉을 지낸 영(瀛)의 손자로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774년(영조 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창국(昌國)은 1750년(영조 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거쳐 능참봉(陵參奉)을 역임했으며, 규한(逵翰)은 1780년(정조 4) 등제한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내 수성 최씨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성최씨(隋城崔氏)는 전국에 61,2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수성최씨조상인물 영규계(永奎系) 최흡(崔 洽)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이르렀다. 최필(崔 泌) 고려(高麗)에서 밀직사(密直司)를 역임하였다. 최원개(崔元凱) 호(號)는 봉암(鳳巖), 찬성사 흡(洽)의 아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사헌부 집의 (司憲府執義) 겸 판삼사좌사(判三司左使)․서경유수(西京留守)․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재임중 18조 소(疏)를 3회에 걸쳐 상소(上疏)하였으나 척소(斥訴)되자 치사(致仕)하고 물러나 향리(鄕里)에서 후진양성(後進養成)과 저서(著書)로 일생을 보냈다. 최문개(崔文凱) 고려(高麗)에서 종부령(宗簿令)을 역임하였다. 최책(崔 策) 고려조에 청송 감무(靑松監務)를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 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최선(崔 善) 조선 때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을 지냈다. 최의(崔 義) 조선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검교호조참판(檢校戶曹參判)을 역임. 최경(崔 涇)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책록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 수성군(隨城君)에 추봉되었다. 최온(崔 溫) 조선조(朝鮮朝)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세온(崔世溫) 조선(朝鮮) 때 덕천 군수(德川郡守)를 지냈다. 최중온(崔仲溫)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수산(崔水山) 조선(朝鮮)에서 지안산군사(知安山郡社)를 지냈다. 최말산(崔末山)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최유림(崔有臨) 1462(세조 8)~1471(성종 2) 자(字)는 자앙(子昻),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수성군(隋城君) 경(涇)의 아들.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 鎭撫)를 지내고, 1455년(단종 3) 사직(司直)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이 되었다. 1464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비장(裨 將)이 되어 함흥(咸興) 등지에서 난군을 격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이 되고,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최유용(崔有容) 안양공(安襄公)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의 동생.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하고,통정대부(通政大夫)․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최유항(崔有恒) 조선조(朝鮮朝)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최유근(崔有根) 조선(朝鮮)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사기(崔賜起)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이기(崔李起) 호(號)는 둔재(遯齋). 조선(朝鮮) 때 한림학사(翰林學 士)를 지냈다. 최경기(崔敬起)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를 역임하였다. 최윤신(崔潤身) 호(號)는 극기재(克己齋), 유림(有臨)의 아들. 사마(司馬)로 공로(功勞)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고 치사(致仕)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최윤종(崔潤宗) 조선 때 회산 감역(回山監役)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최윤명(崔潤明) 자(字)는 여회(汝晦), 호(號)는 방촌(芳村), 좌찬성(左贊成) 유항(有恒)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최윤지(崔潤智)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종한(崔宗漢)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천령(崔天齡) 조선조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최억령(崔億齡)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백령(崔百齡) 조선(朝鮮)에서 정랑(正郞)을 지냈다. 최석령(崔碩齡) 호(號)는 송계(松溪). 태종(太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서흥 교수(瑞興敎授)를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 최윤령(崔潤齡)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최정령(崔廷齡)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지냈다. 최언호(崔彦浩) 자(字)는 호연(浩然), 감역(監役) 윤종(潤宗)의 아들. 1528년(중종 23)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고 보덕(輔德)․필선(弼善)을 거쳐 통진부사(通津府使)․공주목사(公州牧使)․수원 부사(水原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병조참의(兵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고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이르렀다. 최언식(崔彦湜) 조선(朝鮮) 때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다. 최보한(崔輔漢) ?~1546(명종 1) 자(字)는 언경(彦卿), 윤명(潤明)의 아들. 1524년(중종 19)에 생원(生員)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1538년 직제학(直提學)이 되어 참찬관(參撰官)을 겸하였다.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542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 使)로 나갔다가 이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大司憲),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거절하여 나 숙(羅 淑)의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대호군(大護軍)에 기용, 이해 인종(仁宗)이 죽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는 데 참가,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이 되고 수산군(隨山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했다. 1546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이어 우참찬(右參贊)이 되어죽었다. 최필한(崔弼漢)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자수(崔子洙)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선건(崔善建)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인건(崔仁建)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개(崔 漑)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평(崔 泙)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최인(崔 燐)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서(崔 湑)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한(崔 漢)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최임(崔 林)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최장(崔 樟) 조선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최표(崔 標) 조선 때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역임하였다. 최순준(崔順浚)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희효(崔希孝) 자(字)는 언순(彦順), 윤신(潤身)의 손자, 무과(武科)에급제하여 정주(定州)․선천(宣川)․창성 판관(昌城判官)을 거쳐 예빈부정(禮賓副正)․부령 부사(富寧府使)․정평 부사(定平府使)를 지내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다녀왔다. 경상좌도(慶尙左道)와 충청좌도(忠淸左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천거되었으나 취임(就任)치 않았다. 최광두(崔光斗) 조선조(朝鮮朝)에 정랑(正郞)을 지냈다. 최세관(崔世寬)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응호(崔應浩)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최효건(崔孝騫) 1608(선조 41) ~ 1671(현종 12) 자(字)는 성허(聖許), 호(號)는 하산(何山), 상고(尙古)의 아들.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를 거쳐 결성(結城)․영평(永平)․재령(載寧)․단천(端川)․안산(安山)․안성(安城)․부평(富平) 등지의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丞旨)에 이르렀다. 최정현(崔廷顯)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으로 세자를 심양(瀋陽)에 호종(扈從)하였고,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道水軍節制使)가 되었다. 최충원(崔忠元) 자(字)는 진백(盡伯), 호(號)는 우강(牛江).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세자시강원 문학․지제교(知製敎)․서장관(書狀官)․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영변 판관을 역임하였다. 최정원(崔貞元) 자(字)는 정백(正佰), 호(號)는 소강(昭江).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主官)을 거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최욱(崔 煜) 자(字)는 여명(汝明), 호(號)는 뢰산(耒山).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세자시강원 문학 겸 필선․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정선(旌善)․영광(靈光)․고성(固城)의 군수(郡守)와 청송(靑松) ․밀양(密陽)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최정운(崔挺雲) 자(字)는 영망(英望).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서 1579년(선조 12)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최진운(崔振雲) 자(字)는 문망(文望).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병조 좌랑(兵曹佐郞)․지평(持平)․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최형록(崔亨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다수 참획(斬獲)하여 그 공으로 예빈 참봉(禮賓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였다.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최좌해(崔左海) 자(字)는 백하(伯下), 호(號)는 산당(山堂), 시호(諡號)는 연정(淵正). 도고문장(道高文章)으로 영종(英宗) 때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천거되었으나 남인(南人)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최응일(崔應一) 조선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강동 현감(江東縣監)을 지냈고 한풍군(漢豐君)에 봉해졌다. 최경종(崔敬宗)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판관(訓鍊判官)을 거쳐 마량진 수군첨절제사(馬梁津水軍節制使)를 지냈다. 최영(崔 郢) 자(字)는 선유(善諭).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서 이 팔(李 팔)의 난(亂)을 당하여 왕을 수원(水原)으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願從功臣)으로 청하현감(淸河縣監)이되고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추증되었다. 최결(崔 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백의종군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州簿)가 되고 원종공신(原慫功臣)에 올랐다. 최태후(崔泰厚) 자(字)는 여중(汝重). 1638년(숙종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90년 문과에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하양 현감(河陽縣監)을 지냈다. 최진창(崔震昌) 자(字)는 달보(達甫).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용강 현령(龍岡縣令)․순천 군수(順川郡守) 겸 성천진관 병마절제사(成川鎭官兵馬節制使)에 이르렀다. 최치중(崔致重) 호(號)는 난곡(蘭谷). 조선에서 장령(掌令)을 지냈다. 최치백(崔致白)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최진한(崔鎭漢) 자(字)는 천경(天擎).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慶尙左右道兵馬節度使)․금위아장(禁衛亞將)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최도문(崔道文) 자(字)는 기보(器甫), 호(號)는 매은(梅隱). 영종(英宗)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삼척 현감 (三陟縣監)을 역임했다. 최일황(崔一晃) 자(字)는 광중(光中), 정종(正宗) 때 무과에 급제하여 문경진관(聞慶鎭管)․조령별장(鳥嶺別將)을 지냈으며 효행(孝行)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최입(崔 笠) 자(字)는 공립(公立). 무과에 급제하여 흥덕(興德)․곤양(昆陽)․해미 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장흥 부사(長興府使)․함흥 부사(咸興府使)를 역임했다. 최종호(崔宗鎬) 자(字)는 동보(同甫), 호(號)는 소암(紹巖).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겸 한림(翰林)이 되었다. 최한응(崔漢膺) 자(字)는 준원(俊元). 조선 때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최치영(崔致永) 자(字)는 정숙(貞淑). 철종(哲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종(咸從)․삼척(三陟)․숙천(肅川)․창원(昌原) 부사(府使)를거쳐 전라우수사․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역임, 별영별장(別營別將)․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최상일(崔相一) 자(字)는 사준(士俊), 호(號)는 광암(光菴). 고종(高宗)때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 군수(同副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상설(崔相卨) 자(字)는 익경(益卿), 무과에 급제하고, 시위일대 육군정위(侍衛一隊陸軍正尉)로서 1907년(순종 1) 군대해산의 명을 듣고 격분하여 일본군대에 돌격(突擊)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방면(放免)되었다. 그의 충의지지(忠義之志)에 모두 감탄하였다. 최종화(崔宗和)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3․1운동에 가담하여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獄死)했다.
최거경(崔居涇) 조선조(朝鮮朝)에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냈다. 최순(崔 淳) 자(字)는 자영(子泳). 조선 때 경차관(敬差官)을 지냈다. 최귀당(崔貴溏) 자(字)는 연연(淵淵). 조선(朝鮮) 때 대호군(大護軍)을역임하였다. 최낙궁(崔樂窮) 자(字)는 거안(居安). 조선(朝鮮)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최희열(崔希說) 자(字)는 경뢰(景賚), 호(號)는 삼주(三洲).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희윤(崔希尹) 자(字)는 경임(景任), 호(號)는 경재(敬齋). 조선(朝鮮)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희급(崔希伋) 자(字)는 경사(景思), 호(號)는 청재(淸齋). 조선조(朝鮮朝)에 장사랑(將士郞)에 이르렀다. 최희민(崔希閔) 자(字)는 경은(景誾), 호(號)는 학곡(鶴谷).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최희량(崔希亮) 1560(명종 15)~1651(효종 2) 자(字)는 경명(景明), 호(號)는 일옹(逸翁), 시호(諡號)는 무숙(武肅).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로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노량(露梁) 싸움에서 이순신이 전사(戰死)하자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774년(영조 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1800년(정조 24) 고향의 사당(祠堂)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최찬(崔 纘) 자(字)는 백승(佰承), 호(號)는 고송(孤松).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에 임명되었으나 교지(敎旨)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저서로는 고송유고(孤松遺稿)가 있다. 최완(崔 婉) 자(字)는 중길(仲吉).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결(崔 結) 자(字)는 해지(解之). 조선(朝鮮)에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최창국(崔昌國) 자(字)는 군옥(君玉). 1750년(영조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38위로 급제하고 온릉 참봉을 거처 호(戶)․예(禮)․공(工)․형(形)․병조(兵曹)의 좌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최인현(崔仁山見) 자(字)는 자앙(子仰), 호(號)는 송계(松溪). 조선때 교위 (校尉)를 지냈다. 최규한(崔逵翰) 자(字)는 운거(雲擧). 1780년(정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냈다. 최진(崔 縉) 자(字)는 문중(文仲). 조선 때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최연(崔 練) 자(字)는 중정(仲精), 호(號)는 운곡(雲谷).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최봉현(崔鳳鉉) 자(字)는 성휘(聖輝), 호(號)는 연사(蓮沙). 조선(朝鮮)때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최윤호(崔潤湖) 자(字)는 윤명(允明), 호(號)는 연송(淵松). 조선(朝鮮)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윤식(崔潤植) 자(字)는 명화(明化), 호(號)는 송헌(松軒).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최도한(崔道翰) 자(字)는 문표(文豹), 호(號)는 학헌(鶴軒).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달현(崔達鉉) 자(字)는 중진(重振), 호(號)는 죽사(竹史).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명세(崔命世) 자(字)는 수여(壽汝).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인휴(崔麟休)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두남(斗南). 조선(朝鮮)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과거 급제자
문과
최인휴(崔麟休) 최종호(崔宗鎬) 최치백(崔致白) 최한응(崔漢膺) 무과 최경호(崔景皓) 최규호(崔圭鎬) 최대흥(崔大興) 최만빈(崔萬彬) 최성갑(崔聖甲) 최승붕(崔昇鵬) 최운핵(崔雲翮) 최응득(崔應得) 최종두(崔宗斗) 최준항(崔峻恒) 최천동(崔千東) 최효석(崔孝錫) 최희석(崔憙錫) 생원시 최경남(崔景南) 최경호(崔景濩) 최광련(崔光鍊) 최구서(崔龜瑞) 최내수(崔乃秀) 최도문(崔道文) 최도형(崔道亨) 최재성(崔在聲) 최진보(崔鎭普) 최진석(崔晉錫) 최치백(崔致白) 최홍석(崔鴻錫) 진사시 최광언(崔光彦) 최성두(崔星斗) 최수복(崔受復) 최순횡(崔淳鑅) 최윤수(崔胤秀) 최일창(崔日昌) 최한광(崔漢光) 음양과 최광겸(崔光謙) 최광국(崔光國) 최광근(崔光謹) 최광빈(崔光賓) 최덕진(崔德鎭) 최영식(崔永植) 최윤적(崔允迪)
현대 인물
- 최영희(崔榮喜, 1921 ~ 2006) : 16대 국방부 장관
- 최중경 : 지식 경제부장관 - 최윤희(崔允喜) : 합참의장 - 최종건(崔鍾建) : SK그룹 창업주 - 최종현(崔鍾賢) : SK그룹 회장 - 최신원 : SKC그룹 회장, 최종건의 차남 - 최창원 : SK가스 부회장, SK케미칼 부회장, SK 와이번스 구단주, 최종건의 삼남 - 최태원(崔泰源) : SK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 최인호 : 별들의 고향
최효건[ 崔孝騫 ]정의1608(선조 41)∼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수성(水原). 자는 성허(聖許), 호는 하산(何山). 최수준(崔秀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기남(崔起南)이고, 아버지는 최상고(崔尙古)이며, 어머니는 익성군(益城君)형령(亨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사마시에 합격, 1630년 능참봉(陵參奉)으로 등용되고, 1634년 봉사(奉事)에 이어 1636년 직장이 되었다. 그 해 병자호란을 만나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으며, 이듬해 주부가 되었다가 곧 감찰로 승직되었다. 1638년 용안현감으로 나갔다가 1642년 병으로 사직하였고, 이듬해 금오랑(金吾郎)으로 등용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해 익산부사가 되었으며,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아부할 줄을 몰랐으며, 문장과 시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하산집』이 있다. 참고문헌『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국조방목(國朝榜目)』『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역 국조인물고 최효건[ 崔孝騫 ]
시(詩)의 도(道)는 법이 없어서도 아니되고 법에 구애되어서도 아니된다. 불녕(不佞)이 일찍이 들으니, 주자(朱子)가 시를 논함에 있어 풍(風)ㆍ아(雅)의 정(正)과 변(變)의 구별에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혹인(或人)의 물음에 대한 답에서 “관관저구(關關雎鳩, ≪시경(詩經)≫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였으니, 통쾌하도다 이 말이여! 천고(千古)의 굳은 견해를 깨뜨릴 수 있고 생동감 있는 문구가 될 수 있다.대체로 시(詩)는 어떠한 것인가? 성령(性靈)에 근원을 두어 물상(物象)에서 가차하여 청(靑)과 황(黃)이 교착(交錯)하는 것이 문(文)이요, 궁(宮)과 상(商)이 선회하여 율(律)이 되는 것을 전칙(典則)이라 할 수 없고 가는 데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신(神)은 방향이 없고 역(易)은 체(體)가 없다. 시 역시 이러하다. 그러므로 물상에 전환이 있어 눈[雪] 속의 파초(芭蕉)라 해도 좋고, 환경에 몰입(沒入)되어 겨자[芥] 속의 수미산(須彌山)이라 해도 좋으니, 이 어찌 안배(安排)에 얽매일 것이 있겠는가?우리 동방(東方)의 시의 연원(淵源)은 얕아서 헌장(憲章)을 더 논할 만한 것이 못되나 유독 그 기휘(忌諱)에 철저하고 인습(因襲)에 젖어 있으니, 실은 3백 년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그러나 선묘(宣廟) 이전은 비록 절묘하고 옹졸함은 있으나 그래도 각각 그 본색을 드러냈고 그 후 점점 품위가 있게 되면서 연마와 수식(修飾)이 날로 성해지고 기휘가 더욱 심해지며 인습이 더욱 깊어지니 옛 것을 본 뜨는 것이 아니오 마침내는 법에 구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事物)을 명함에 있어 반드시 유집(類集)에 의해서 일삼게 되고 내력을 갖게 해서 범위 안으로 빨려 들어가 감히 한 발짝도 곁으로 달릴 수 없게 하여 마침내 진기(眞機)를 활용해 규제하여 시행이 되지 못하게 하니, 어찌 다시 중류(中流)를 가로질러 건너 올라갈 수 있겠는가? 대체로 합하여 논하면 백가(百家)가 하나의 격식으로서 곧 한 사람의 작품이요, 마침내는 뇌동(雷動)하게 되고 정치(情致)가 혼동되며, 또 천편일률(千篇一律)이 되어 선별할 수 없이 되니, 아! 시를 감상할 수 있겠으며 어찌 이와 같이 하려는 것인가?나는 청구(靑丘)의 시가 이와 같이 법에 구애됨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늦게 하산(何山)의 시를 얻어 읽으매 이는 진정 기휘(忌諱)에서 벗어나고 인습을 불안하게 여긴 것이다. 그 체(體)와 격(格)을 보면 당(唐)이나 송(宋)의 체와 격이 아니오 스승으로부터 이어 받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으나, 성조(聲調)가 해맑고 기기(氣機)가 드넓으며 때때로 갑자기 다가와 험하고 기이함을 만들어 내고, 갑자기 냉수를 등에 퍼붓고 번개가 눈에 번쩍이는 것 같아 거의 사람에게 간담을 흔들고 정신을 빼앗는 것 같았다. 천천히 연역(演繹)함에 있어서는 갖가지 경지(境地)가 모두 백태(百態)를 연출하니 놀랍고도 기뻐 절로 입이 벌어지며 손뼉을 친 지 오래이다. 이 시가 없었다면 비록 백 년의 격(格)을 창조하였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공(公)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효건(孝騫)이며 하산(何山)은 그 호이다. 좋은 시대에 일찍이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은 크게 오르지 못하였고 늦게 소인(小人)의 거스름을 받아 대부분 실의(失意)에 빠졌었으나 유독 그 넓은 생각과 조화로운 금도(襟度)는 비록 빈곤한 때라 하더라도 태연히 궁함을 즐겼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아끼는 정성에 있어서 언제나 태평과 풍년을 희망함은 거의 자미(子美, 두보(杜甫))가 식사 때마다 잊지 않음과 같다. 무릇 이를 시(詩)에서 볼 수 있어 역시 사모할 만한 것이었으나, 한 때의 따르고 노닌 바에 대체로 문인(文人) 명류(名流)가 많았는데, 추천을 받았다거나 성망(聲望)을 빌었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니, 괴이하도다. 심하다! 음운(音韻)을 감상하기 어려움이여. 문장 역시 크고 예리하여 자못 건장한 말처럼 기발한 힘이 있었으나 선뜻 마음 써 교정(校正)하려 아니하였다. 이러므로 완편(完篇)이 적었고 버려서는 아니되는 것이 있다. 공은 곧고 굳세어 세상에 값을 구하려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먼지 쌓인 상자에 넣어 둔 유고(遺稿)가 야광주(夜光珠)를 궤(樻)에 쌓아 두고 고검(古劍)을 옥(獄)에 묻은 것이나 다름없이 반 백년(半百年)이나 묻혀 있었는데, 그 증손 최치성(崔致城) 철경(哲卿)이 하루아침에 유고를 안고 설산(雪山) 깊은 곳으로 나를 찾아와 곧 교정(校訂)을 명하였다. 나는 선뜻 이에 응하였으니, 어찌 성(聲)과 기(氣)의 감응을 앞과 뒤로 한계를 두어서는 아니되고 현세(現世)와 전세(前世)가 만나는 것은 또 운수(運數)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철경이 다시 와 간인(刊印)의 일을 마치게 되었다며 책머리의 한 말을 청하였다. 나 또한 사양치 아니하고 그러하겠다고 하였다. 감히 공의 명성을 영구히 전하겠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금세(今世)의 문필가에게 널리 고하노니, 시(詩)는 하산(河山)처럼 해야만 바야흐로 시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과]최효건 [崔孝騫]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