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무관이다.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대립(大立)이다. 父는 광규(光奎)이고 母는 남원 윤씨다.癸卯 武科급제.1629년(인조 7) 사헌부 감찰을 거쳐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역임하였다. 묘는 평택시 포승읍 도곡리 무수리산 선조 북쪽에 있다.
최명후 (崔鳴後) 1609 ~ 미상
조선 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자는 명지(明之)이다. 부는 인수(麟壽)이다. 인조 15년(1637) 정축 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637년 선전관과 초관을 거쳐 1653년 덕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656년 충청병우후 1658년 곽산군수를 거쳐 1661년 경흥부사를 제수받았다. 묘는 평택 방혜동 선조남강유좌 합봉이다.
최진창 (崔震昌) 1622.4.18 ~ 미상
조선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자는 달부(達夫)이다. 부는 영후(榮後)이고 모는 창녕성씨다.
효종2년(1651) 신묘년에 별시 별과에 급제하였다. 1658년 도총도사 및 파총을 거쳐 1666년 위원군수(渭原郡守), 1674년 순천군수 1678년 울진현령을 역임하였다.
최정현 (최정현) 1611 ~ 미상
조선 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수성(隨城) 자는 공달(公達)이다. 아버지는 인건(仁建)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다.
1633년(인조 11) 무과에 급제하였다. 1937년 병자호란시 선전관으로 소현세자의 익찬(翊贊)을 겸하여 청나라 심양까지 수행 보호하고 있다가 환국한 후 1648년 훈련원 첨정 1649년 겸 내승을 거쳐 덕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653년 덕원부사 1656년 나주영장, 1657년 오위장, 장흥현감 등을 하였고 1658년 명천부사를 한 후 1658년 호군이 되어 죽산 부사를 하였다. 이듬해 전남 우병사 외 전남 좌수사를 역임하였고, 1662녀니 평해 군수 1671년에는 태안군수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묘는 평택시 포승읍 무수리 선조하 간좌다.
조선중기 무인이다. 본관은 수성(隨城) 자는 윤지(胤之)다. 아버지는 태망(泰望)이고 어머니는 해주오씨이다. 171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724년 선전관을 거쳐 1925년 훈련판관, 도총도사, 훈련첨정을 역임하였고 1726년 충주경력, 도총경력 1728년 고산리 첨사 1734년 파총이 되었다. 1736년 훈련도감파총 1739년 부호군이 되었다. 1746년에 졸하였다. 묘는 평택시 포승읍 재촌 승배산에 있다.
최상후 (崔尙厚) 1712 ~ 1802
조선중기 무관이다. 본관은 수성(隨城) 자는 재원(載元)이다. 부는 보신(保身)이고 모는 영천
이씨다. 1736년(영조 12)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749년 수문장 1754년 도총도사를 거쳐 1756년 충주부 경력 전라 좌수사를 역임하였고 1757년 부호군이 되었다. 1772년 강령현감(康翎縣監)을 지냈다. 1802년에 졸하였다. 묘는 평택시 포승읍 도곡리 선산에 있다.
최명호 (崔命鎬) 1796 ~ 1859
조선 후기 무신이다. 본관은 수성(隨城)이고 자는 주향(周鄕)이다. 아버지는 립(笠)이고 어머니는 평창 이씨다. 1815년(순조 1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전라 우후, 경상진주 병무우후 등을 역임하였다. 1859년 졸하였다. 묘는 평택시 도곡리 무수리 선산에 있다.
최 기익 (崔基益) 1827.09.06 ~ 1912.01.05
본관은 수성(隨城)이고 자는 인겸(仁謙)으로 원영(元榮)의 장남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지서(百家之書)에 통달하였다. 특히 삼강행실의 근본이 투철하여 범백사(凡百事)에 놀라운 학문적 지식을 보여줌으로써 인근의 세평이 대단하였다. 1902년 임인년에 벼슬이 정3품 통정대부로 제수되었고, 1904년에는 가선대부로 올랐다. 관직을 사임하고는 진위군 유림에서 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추천되어 교관을 봉직하면서 10여 년간 활동 하였는데 사재를 들여 성역을 보수하고 유도의 보급에 힘썼다. 1912년 1월 5일 졸하였다.
묘는 도곡동 선영이며 부인은 정부인 파평 윤씨이고 합봉이다.
최 성익 (崔聖益)
조선 고종 때의 효자. 본관은 수성(隨城). 포승면 도곡리 출생. 10세 때, 후사가 없던 숙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봉공(奉供)의 정성을 다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갖추었고 구미에 맞는 음식으로 항시 식탁을 준비하였다. 모친이 다리에 종기가 나서 3년여를 구로(劬勞)함에는 그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완쾌시켰다. 어사 이한영의 장계(狀啓)로써 고종 때 효자정홍(孝子旌紅)의 은전을 받았다.
최 성윤 (崔聖胤)
본관은 수성(隨城)이며, 호는 무수옹(無愁翕)이다. 시조 문헌공의 12세손이고 가산공의 7세손으로 형조참의 치망(致望)의 아들이다. 조선 인조 갑신생으로 도덕군자인 명문대가의 선비 가통을 계승하고 성장해왔다. 그는 선비의 나갈 길은 곧 입신양명(立身揚名)에만 있다하지 아니하고, 반면 산림에 은거하여 자손들을 잘 교도해 신명을 잘 보존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또 부모님 봉양에도 온갖 효성을 다하고 동기일신(同氣一身)의 돈목(敦睦)을 늘 강조하는 사상이 깊어 그의 정신을 자타가 칭송해왔다. 또한 학문적인 문장에도 출중하여 당대의 명인 서파(西坡) 오도일(吳道日)의 추천으로 감역(監役)의 벼슬이 제수되나 이를 거절하고 산간에 은거하면서 휴학의 인도에만 정진하였다. 그로 인하여 덕망이 사해(四海)에 떨치고 그의 제자와 유림에서는 그를 일민(逸民)이라 논해왔다.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사모하던 사림에서는 그가 묻힌 포승면 도곡리를 공의 아호 무수자(無愁字)를 따라서 동명을 무수시라 칭하고 있다. 오늘날 포승면 무수동명은 그의 유택(幽宅)과 함께 유래되고 있다.
최 창운 (崔 昌運)
1624(인조 1) ~ 1695(숙종 18). 조선후기의 무신. 자는 응휴(應休), 본관은 수성(隨城). 1660년 (현종 1)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禦侮將軍 行龍驤衛副司果)를 제수 받았고, 그해 황주진관 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1664년 겸선전관에 임명되었고 1668년 노강진 수군 첨절제사(路江鎭水軍僉節制使)로 부임하였다. 1672년 훈련첨정 축안 군수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독곡동 산 44번지에 있다.
최완복 : 초대 통일부장관을 알아보는 중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수성인과 수원인 인가를 알아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