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97년(연산3년)왕자의 사부를 지냈을 정도로 학문적⦁인격적으로 뛰어난 학자였던 백익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머니는 단양 우씨이다.
본관은 수원,자는 사위(士偉),호는 휴암(休庵),시호는 인조 때 충숙(忠肅)을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그리고 사후인1603년(선조36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그는 태어난 지1년도 채 못 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집 한 칸에서 겨우 살림을 꾸려나갔다.그러나 살던 집마저도 연산군이 사냥터로 늘리면서 철거당했기 때문에 셋방을 얻어 살아야만 했다.또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자식 교육에 온 힘을 쏟았기 때문에 정암 조광조와 모재 김안국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특히 스승인 조광조를 높이 사모하여 조광조가 사는 집 곁에 집을 얻어 공부할 정도였다.
23세 때(1519년)기묘사화로 스승을 잃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은거하였다가3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41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45세 때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남평현감으로4년간 봉직하면서 서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하고,세금을 적게 거두면서 옥사를 처결함에 있어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평하게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너진 관청과 창고를 수리하는데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고 공미(公米)를 덜어서 개수하니 백성들 모두 탄복하였다.
49세(1545년) 때인 명종 즉위 후 윤원형 등 소윤파가 대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 대윤파를 제거할 때 사간원 헌납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최보한⦁허자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나 낙향했다.
그 뒤51세(1547년)때는 문정왕후의 수렴 첨정과 권신 이기 등의 국정문란을 비난하는 양재역의 벽서사건을 기화로 소윤세력이 대윤의 잔존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되어 안변에5년간 유배를 당하였다가1551년 사면된 후에 낙향했다.
69세(1565년)때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 교리로 재 등용되었고, 71세 때 양주목사로 재직할 적에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 등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이렇게 평생 한직으로 전전하다 명종22년,일흔 한 살 늦은나이에 홍문관의 교리(정5품)를 맡아 세상의 화제가 되었다.그만큼교리라는 벼슬이 권세나 품계로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깨끗한 문벌,선비나 학자의 벼슬로서는 최고라는 자긍심이 있었다.
또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로 얼룩진 시대였고,조정에 새로운 피를 불어넣었던 개혁적 성향의 사림파는 수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특히 그의 스승인 조광조와 그의 동문들이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여러 차례 파직과 귀양을 가기도 했다.따라서 이러한 세태에 환멸을 느끼고 수차례 은거하기도 했기 때문에 벼슬살이는 그다지 순탄치 못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뒤72세 때 선조가 직접 편지를 보내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이후 이조⦁공조⦁병조참판,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분당이 일어나자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74세 때 다시 파주로 낙향하였다. 83세 때는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다시 동서 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고,동지춘추관사로<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면서 퇴계 이황과 철학적인 토론을 전개한 바 있고,파주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성산학(城山學)’을 낳게 하였다.뿐만 아니라 기묘사화 이후 명종 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특히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1579년(선조12년) 83세에 별세하였는데,‘거처하는 집이 가난 검소하고,입고 먹는 것은 거칠고 성기며,먼지가 내려앉아 방석에 가득하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임금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시종일관 돌보아 줌이 변치 않았다’고<선조수정실록 백인걸의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저서로는<휴암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