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이 치러지고 난 직후부터 아고라에 들어가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절대 지지 세력의기반이 된경북사람들을두고 흉노족의 종자들이라고 하면서 한층 더 격앙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그 발언은 어떻게 보면 선거패배에대한 맨붕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발악이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같은 나라 국민이면서도 굳이 경상도 사람들을 일러흉노족의 종자들이란 막가파식발언은 국민대통합을 위한 노력에 역행하는 반민족적인 행위로 지탄을 받기에 충분한것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지만 인류사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우리민족은언어학적으로퉁그스족에 포함된 민족이며이 퉁그스족에 속하는 민족은 말갈, 거란, 여진, 만주, 예맥족, 흉노족, 선비족,토번, 돌궐족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좀더 알기 쉽도록 설명을 하자면동쪽은 사할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강에 걸치고, 또 북쪽은야쿠티아자치공화국의 극한(極寒) 툰드라 지대로부터 남쪽으로는 중국 동북(만주) 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분포하여만주-퉁구스어(語系)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일반적으로 만주어파(滿洲語派)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제외하고퉁구스어파의 각방언을사용하는 민족을 퉁구스라고 한다. 인종학적으로는 몽골인종에 속하는데신장은 크지않고두형(頭形)은 단두(短頭) 내지중두(中頭), 코는 작고 낮으며 광대뼈가 솟아 있다. 눈과 모발은 검거나 암색(暗色)이고두발은 직모(直毛)이며, 수염과체모는 적다. 피부는 누런빛을 띠고 있으나 비교적 흰 편이다. 영아의 엉덩이에는 몽골반점이 나타나는 율이 높다. 분포지역의 자연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생활양식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흉노족은 어떤 민족인가?
고대 대부여(大夫餘)가 많은 부족으로 갈라지고 중국 북부가 어지럽게 되기 시작한서기전 3세기 말부터 그 이름이 알려지게된 흉노족(匈奴族)은 우리 환족(桓族)의 한 분파다. 이들의 부족이름인 흉(匈)은 환(桓)으로부터 모음교체한 소리 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과 가라환족(烏桓族=契丹族)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전한(前漢)을 빼앗아신(新)나라(서기 9년~24년까지 존속)를 세운 왕망(王莽)은 흉노족과 가라환족의 교통을방해했기 때문에 흉노족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받았던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비족인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鮮卑大王)를 자칭했는데, 선우(單于)라는 말이흉노족의 황제(皇帝)를 가리키는 말인 것을 보아도이들은 모두 한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임을 알수 있다. (匈奴族이란 한족들이 비하하는 뜻으로사용했는데 흉물스런 노예같은 족속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실은 대제국을 건설한 민족임에 글자의 의미는 염두에 두지마시기를...벽초)경상도 사람을 흉노족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은 과연 몽고반점의 특징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일까? 그렇다면 그렇게 흉노족의 종자들이라고 욕하는 자들의 조상은 어느 민족의후예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없는것이다. 이미 수천년전의 일이요 오늘날 다문화시대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마당에 굳이 확실하지도 않는 흉노족을 들먹이며경상도 사람들만이 흉노족의 후예인 것처럼 떠벌리는 저들의 경상도 사람 폄하주장은참으로 납득할수 없는 처사라아니할수 없는것이다. 긴역사로 이어진 대한민국, 과연 오늘날에도 경상도 땅에만 신라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것일까?
고려가 건국되자흉노족 김씨 일파(경순왕을 비롯한 경주김의 후예들)는 재빨리 왕건에게 붙어서대대손손 부귀영화를누리며 자손을 번창시켰으니 이 나라에 김씨 피를 이어받지 않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 김부식만 해도 그렇다. 신라멸망의 책임을 경애왕에게 몽당 덮어씌우고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친 공로로 왕건의 사위가 된 경순왕에게는 한마디허물도 기록하지 않으면서 그 추운 포석정에서 나라위해 제를 올리던 경애왕을 유상곡수에 술잔을 돌리며 방탕한놀이를즐기다 나라를 망쳤다고 기록했던 김부식, 물론 사대사관에 입각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상당 부분 왜곡이 있음을모르는국민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저들이 주장하는 흉노족의 종자들이란 근거는 무엇일까를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金日磾, bc 134년~86년)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부왕이 한무제(漢武帝) 때 곽거병(霍去病)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와 처음엔 말을 키우는 노비(馬奴)로살다 한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馬監)이 된다. 그리고한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끝에 체포한 공으로 제후인 ‘투후(秺侯)’라는 벼슬까지 받는다.1954년 섬서성서안에서 발견된 김씨부인(신라인)의 묘비. 신라 김씨의 기원이 적혀있다. 김일제는 한 무제로부터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는데,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김씨 성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마지막의 사관논찬과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이유가 잘설명되는 부분이라 한다.
그리고 한무제는 죽을때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내린다.
즉 김씨가 한나라 조정의 권력핵심에 들어간 것이었다. 죽어서는 곽거병과 함께 한무제의 묘역에 안장되기도 한다.
김일제의 투후(秺候) 벼슬은 자손들에게 세습되어 7세를 전한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대략적인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기록되어 있다.
김씨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 서기 864년에 32세의나이로생을 마감했는데자신이살던 섬서성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아래와같이 적혀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하시고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김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계시다가서한(전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한무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한(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피난하게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김씨 부인의 먼조상이 흉노 휴도왕의태자인 김일제이고 김일제는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초로 흉노족과 신라왕계의 연관성을 주장한 인간은 일제시대 미술사학자 에가미 나미오 라는 사람인데이 사람은 북방시베리아의 수혈식 적석목곽분과 경주지역의 대표적인 신라묘제인적석목곽분과의 유사점을 토대로 이러한 주장을 펴고있다. 해방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미술사, 고고학을 배운 사람들이 한국고고학의 초석을 닦아 그 과정에서자신이 배운 일본학자의 이론을 따라가게 되면서부터 정설처럼기마민족설을 근거로한 여러가지 학설들이 나오게되는것이다. 이런 북방기마민족설의 한가지 증거라고 할수 있었던 시베리아지역 적석목곽분과 신라 묘제인 적석목곽분은묘제자체는상당히 유사하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차이가 최소 400년이고 최고 600년 정도의 차이가나는것이니 이 북방기마민족 설은 최근 들어 신빙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 한반도내에서 엄청나게 많이 발굴된 고인돌자료를 분석해보면 위석석관묘가 신라적석목곽묘로발전했다는 사실은 외부 문물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묘제가 아니라 자생적 묘제발생 이론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흉노족이라 말하는 근거는 또 있다고 하는데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통일의 주역 제30대 문무왕(661~681) 김인문의 비문 일부가 1769년 처음 발견되었고 그 후 200여년이 지난후 1961년 또다시 경주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없어진 상단부가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인 신라 김씨가계가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을 흉노라고 하였으며,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 김일제의 7대손) 이라고밝히고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신라비’의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524년 세운 비석에는 법흥왕을모즉지(牟卽智)’로 표시되어 있으니 ‘모(牟)’는 성이요 ‘즉(卽)’은 이름이고 ‘지(智)’는 존칭으로 풀이 하니 모(MO)가성(姓)인것이다. 23대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인데,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 김(金)씨 왕들의 성이 ‘모(MO)'였음을 알수 있다. 법흥왕의 남동생과 법흥왕의 딸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진흥왕’인데 자기들 끼리 근친상간을 통하여 왕족을유지하는골품제(성골, 진골제도)’를 하였으며 초원 문화를 가진 모용선비족인 기마세력의 면모가 보인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가야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 ‘국호 91호 신라의기마인물상’과 같은 형태훈족의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이에 싣고 다닌것을 볼수 있다. 법흥왕은 개혁군주로서 처음으로 불교를수용 하였으며법흥왕(法興王)을 이은 진흥왕(眞興王) 때부터 처음으로 성을 ‘김(金)’으로 기록 하였다. 진흥왕 재위 25년(564년) 북제에 사신을 보낼때 신라왕의 성명을 ‘김진흥(金眞興)’으로 ‘북제서(北齊書)’에 적혀 있다. 또한 수서(隋書)에수나라 문제 14년(594년), 신라 진평왕(김진평: 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하였으며이후 신라왕의 성을 김(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 기록들은 근거로 모용선비족에 흡수된 흉노족이 모씨로 성씨를 사용했다가 한반도로유입된 이후에는김알지의 김씨로 성을 바꾸어 흉노족 중심의 골품제로 신라정치권력의 독점을 실현한 것이다. 흉노족 중심의 골품제로신라정치권력의 독점의식이 지역공동체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아직도지역통합을 깨고 정치적 독점과 부패를 낳은 영남중심의 영패주의 정치의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도 이들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 되는 김일성 일가가 독재정치로 남북을분단하고 민족의 고통을 안겨준 것은 모두가 이들 흉노족의 후예들이라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