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湖南에서 時急한 一大宗仕라면 前述한 바와 같이 眞正한 上系守統連系大同合譜일 것이며 또 壬辰再亂을 忠武公幕下 右將軍으로 싸우신 破倭一等功信으로서 當然히 國民的 추앙을 받으셔야 할 武肅公 墳墓仙所임에도 不拘하고 헐을대로 헐어 떼가 벗어지고 雜草天地가 되어 一般參지하러 오신 남이 보면 뭐라 하겠는가! [希亮將軍 묘가 왜 이럴까? 子孫들이 돈벌러 다 나가 버리고 없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니 낮도없어 귀가 아퍼라. 또 한 번 아쉬움을 禁치 못하노라또 내가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有志들의 總意라 하여 强行한 바로 神主앞에 가로막고 移葬하여 모신 貞夫人 原州李氏封墳이 분에 넘쳐 노하시는 듯 붉어지고 무너져 있어 바로 神主 앞에여라 風水도 五行도 아니지만 上下葬이라 만들지 말고 다시 後編葬으로 鄭重하게 모셔 永世安도 하심을 삼가 빌어올려야 하겠습니다.그리하여 武肅諡狀도 새겨져 있는 神道碑도 無人石(將軍像)도 좀더 一等功臣兵曹判書답게 改竪하여야 할 것이며 階段도 格式있게 正面으로 新設하고 紅살門(神門)도 세워 駐車場도 增設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龍머리 墓碑에 殉死名單이 아니라 造耕한 有司名單이 表記되어 있음은 웬 말 -常識을 초월한 거사인 凶事라 하겠노라, 내 일개 族丈으로서 公碑左傍아니고 表記하다니 당장 罰을 받았으리라- 하겠노라.
大韓甲戌 秋收滿月에 於 日本東京責任監修 成馬亭 崔 炳 完 謹書- 踏査奉審하여 發掘한 碑石에 對하여 -洛南 始祖이신 中直大夫敎淳의 1489年 淸明立하시고 初體碑를 神의 가르침이 있어 發掘審視하였던 바, 어느새 누가 몰래 묻어 버렸기에 再三堀地하여 永世保全키로 表本까지 세워 後日에 壇으로 해서 改竪키로 했던 바, 또다시 不遜하게도 表木에 내 署名까지 한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파헤쳐 묻어 버리고 本來水原崔氏五世부터 十世까지 새겨 三次나 改碑한 床石에 있어서도 [炳]자가 十七世孫이라 筆禍가 있는 石物은 그대로 두고 墳墓에 屛風石만 둘러 쌓 놓았으니 아주 不吉한 感을 느끼게 하드라.墓碑라면 처음으로 洛南하신 中直大夫敎淳께서 우리 湖南隋城崔氏血肉의 뿌리이신 意義깊은 初體碑일 것이니 永世保全코저 하오며 따라서 中直大夫敎淳의 作故(1486)하신 四年後 立碑하실 때까지 生存하고 계셨던 淑人 固城李氏(영장아짐 洪氏할머니 曾孫女)께서 精誠으로 建喝하시면서 陰記에 隱語(早退 [世譜에 退去로] 水城 [隋아닌 물水]로 한 等]가 담겨있는 石物이어서 後世에 眞正한 宗統을 考證하는 根本이 되었을텐데 碑文을 錯覺하고 歪曲하여 왔기로 우리 湖南의 眞正한 宗統을 밝히지 못하고 딴판으로 現世에 이르렀으니 不覺千萬이라 아니할 수 없느니라.
하므로 湖南子孫의 唯一한 家寶로 할 洛南始祖의 重要한 初體碑를 파헤쳐 묻어 버린 장난꾼 子孫은 어디 數萬里他鄕살이하며 왔다갔다 奉審하여 찾아 우리 子孫들의 뿌리를 考證하는 우리 寶物을 故意로 파 害치고 參與한 子孫에 피해가 미치지 않으면 多幸으로 여기는 바이로다.慈雨도 내려 秋收滿月에 安康하시며 新穀차라 先塋 잘 모셔드리고 올비쌀밥 많이 잡수셔 萬福하시소서. -余不備上-就而 오는 九月二十五日을 前後하여 歸任할 豫定이오니 다시 또 뵙고저 하는 바입니다.1994年 8月 24日 大韓甲戌 處暑 於 日本東京 隋城崔氏大同合譜編纂委員會 責任監修 成馬亭 崔 炳 完謹書近內外戚에게 보내는 書信올해는 豫報도 없이 유난한 무더위 속에 남은 老軀를 주체 못했다.목마른 大地에 慈雨가 뿌려내려 萬物이 촉촉 生起를 품어주니 한 時節을 보내고 한숨쉬어 또 한 時節을 살겠다 싶어 生命의 神秘를 感歎하며 붓을 들어 모처럼 問安을 보내고저 하는 바이니라.도무지 平素에 去來가 없었던 탓으로 궁금하고 籍적하여 疏遠한 처지여서 무어라 消息을 傳하고 무어라 問安을 보냈으면 할런지 할 말을 잊어 망설이면서 붓을 들어보겠노라.이미 風聞으로라도 들어 알고 있을 줄로 思惟하오나 周知한 바와 같이 우리 隋城崔氏가 湖南에서 水原崔氏로 었다 갔다 疑義가 있어 하니라. 眞正한 宗統으로 밝혀 撰修世譜를 編纂刊行하는 重責을 맡아 成就하는데 事務所를 于先 大義洞(前 MBC옆 全南女高 앞) 2-4에 開設하고 二,三個月만에 한번씩 航空便으로 來往하며 執務하고 있으니 틈을 봐서 光州에 들리거든 尋訪하여 주기 바란다.앞으로 親密한 對話로서 因戚의 義理를 두텁게 하며 子弟子孫들과 함께 우리 民族의 固有한 因習으로 崇祖愛族하여 流水와 같이 흐르는 歲月과 함께 남은 余生을 보내고저 하는 바이니 記憶해 주면 고맙게 여기겠노라.如次 내가 태어난 源泉이라 할까. 내 故鄕 陵州는 골골마다 꽃피어 내 九代祖께서 綾州牧訓導로 始居하신 鄕土로서 追憶하여 [十五句二十節詩] 望鄕을 보내며 祖上의 行狀과 世系 내 파란만장한 來歷도 簡略해서 보내노니 査收하여 주면 千萬 고맙겠노라
大韓甲戌 1994年 9月 25日 於 日本東京 湖南綾州出身 癸亥生 成馬亭 崔 炳 完 보냄汎京湖宗統連系大同合譜撰修重要資料와 經過宗報올해는 예년과 달라 극심한 무더위 속에도 불구하고 문중 대소제절께서는 여전하오신지 알고자 문안 드리나니 아울러 하시는 사업에 더욱 번창하심과 많은 발전이 있으시기 千萬바라나이다.過般 幾年前 우리 호남의 어긋난 上系 宗統을 三百有余年만에 기적적으로 밝혀 考證經緯誌와 함께 奉審한 바 있었음은 주지한 사실이거니와 賜姓始祖이신 隋城伯 永奎, 諡 文惠公과 호남의 洛南始祖이신 世朝祖敎差官知製敎 淳의 진정한 宗統으로 연계를 지음에 있어 세기적 撰修世譜를 발간하는 중책을 맡아 이미 착수중에 있음을 알려 드리며 추진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점에 부딪혀 가소로운 鷄卵論爭이 오니 문종중 일반 宗賢의 공론에 붙여 앞으로 우리 종회 운영에 일대 활성화와 새출발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여 책임 監修하는 입장에서 기탄없이 發議하오니 宗門長, 族丈, 宗親重鎭 그리고 학식경험 있으신 宗賢의 귀중한 의견을 모아 만장일치로 납득한 가운데서 결단을 내리고자 하오니 널리 考察하여 주십시오.어디! 우리 호남 자손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멀쩡한 隋城伯 賜姓 崔氏니라─ 그런데 왜 우리 湖南의 上系宗統만이 본래 水原崔氏五世孫 [倡]부터 十世孫 [居涇]까지 六位靈魂이 똑같이 누가 보든 一卵性祖上이어라 ─ 괴상하기 짝이 없어─ 他姓 萬姓譜에도 찾아볼 수 없느니라 ─ 비웃고 보는 族譜 愛好家, 族譜出版社, 傳統文學家, 史學家, 漢學者, 他姓宗會責任有識者, 귀한 양님딸을 보내 옥동자녀들이 들석들석한 우리 외척들이 아마 방방곡곡 전국에서 지금도 웃음 비웃음이 내 귀에 통곡소리 처럼 들려오네 그려 ─.우리는 뚜렷한 賜姓한 隋城崔氏일진데 왜 本來 水原崔氏 門中과 우새스럽게 [네 조상이냐!]니 [내 조상이지!]라 하고 다투고 싸워야 할 것인가! 장난이 아닌 참말이라구 ─ 어리석어 ─ 乳臭해라. 생각해 보면 교통 통신이 미급한 묵은 시대였느니라. 오리무중에서 헤매이고, 당나귀 타고 시행착오한 우리 호남의 그릇된 宗統世譜(歷代世譜原本이 된 重修草譜丁亥1707編)임을 初心으로 認識하여 하루빨리 바로잡아 본래 水原崔氏 五世부터 十世까지의 六位靈魂을 本來 水原崔氏 門中으로 鄭重하게 모셔 보내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진데 [愚者는 多辯 함이니라]
因爲 古人 炳商 族兄 說을 되풀이하여 本來 水原崔氏 六位靈魂 中 十世인 [居涇] 一位 만 남겨 隋城崔氏祖上(洛南始祖 中直大夫 淳의 先考로)으로 모시자고 [白鷗가 까마귀 깐 소리]를 지르니라 ─ 어찌하랴 ─ 우리 조상께서 뭐라 하실까?─양반도 三班도 하신 우리 호남의 貴公子孫들이여!벼락을 줄만한 말도 아닌 말썽이여라 ─ 왜! [居涇]을 싸잡고 말썽이 있느냐 하면 舊 碑文에 [居涇]이 새겨져 있었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舊 碑文이라면 洛南始祖 淳의 初體碑(1489立)를 말함이니라.헌데 初體碑는 내가 發掘 奉審하였는데 他姓 [居涇]名單이 있을 리 萬無하고 다만 洛南 五世宗孫 羊巖公 衡께서 [丁亥 重修草議](1707)하면서 [本貫水原으로 錯覺하여 本來 水原崔氏 孝肅公 婁伯宗中 譜冊에서 七世孫 [有春]을 우리 湖南의 시조라 하신 [有椿]으로 알고 우리 家廟立議의 [八世未祥]이란 空白에 代數를 맞춰 本來 水原崔氏五世孫[倡]부터 十世孫 本[居涇])까지 이어 洛南始祖 淳을 八世라 새겨 改碑한 碑文이니 羊巖公이 作文한 碑銘을 말함이니라.우리가 숭고한 조상을 모시는 자손이니 만치 또다시 [白鷗가 까마귀 깐 소리]를 한 자손이 생기거든 호남에서 벽장 속에 깊이 든 곰팡이 낀 誌狀錄을 뒤져보고 똑똑히 보라 하겠노라. 하여라.즉 初體碑라면 五百五年前에 淸明立한 偶然이 아닌 先瑩의 가르침으로 再三發掘함에 이르러 審視하였으니 바로내가 唯一한 산 증인이라 할 것이니라.
우리 호남(湖南)의 뿌리이신 中直大夫 敎 淳께서 조상에 대한 말씀을 전혀 안하시고 別世(1485卒)하셨으니 先考祖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손들 신상에 무슨 害가 될까 싶어 오히려 철두철미 숨기고 감추고 계셨던 깊은 心情이야 누가 모르겠는가.─ 아주 어려서 政變慘禍로 피난오신 처지라 해서 能히 실필 수 있으리라 하겠노라.연이나 우리 宗統이야 두말할 것 없이 白陽도 같아 千年歷史를 가진 新羅敬順王(入麗承正院)과 비 樂浪公主:王建의 女의 十一世孫으로서 崇祿大夫 麗朝典書兼 寶文閣大卿 慶州金氏 永奎께서 水州 一帶가 괘亂, 民心이 殺伐하여 禽獸와 같이 함을 근심하신 왕을 도우고저 자청하여 同心 安說장군을 副使로 出 治水州하시니 일년도 못되어 孝悌之鄕으로 回歸,善治하신 功德이 컸음으로 忠烈王께서 [太祖를 弓裔의 謨殺에서 救出하신 崔 魏와 같도다]하시어 封 隋城伯 賜姓 崔氏하셨니라(1302년)向後 湖南 按撫使로 계셨다가 急患으로 因하여 교자로 미어 退歸하시고 藥效없이 逝去(1312)하시니 水州民 慕 設祭하시고 諡號를 文惠라 내리셨니라.
(註)口傳[장모따라羅州로 오셨단다.]라云
[妻家따라]도?한데 일부러丈母라 함은 당시丈祖母라 하셨는데 오백년이 지나간 오늘날丈母로 변화한 발언이어라(1417淳生,洛南1450년),丈祖母란 양육하신洪氏할머니,장인李節:현감,장모 여산宋氏[장인李節께서는祖父이신 좌의정容軒公 李原[1426년에數많다 한夫人問題로司憲府에告訴한 자가 있어左議政을剝職하고鐵城府院君,佐命功臣 四等의祿權을 박탈 당한 후의正,本,內室,繼,妾그리고宗,嗣,庶子사이에 잡안의 복잡한 알륵이 있음]를 따라서洪氏할머니 택에서作故하신容軒公 李原의墳墓를 쌓고移葬禮의 대립 등 현감을致仕,伯伊[長水 長溪縣,현溪內 溪北 溪南의 삼면,고성李씨 세보에는伯仍으로 되었음]를退去(1450)하시니 장모라 할까 장조모(洪씨할머니)님 따라妻家 丈人 丈母와 함께 나주草洞으로始居하셨으니羅州 草洞은瀋溪와 더불어固城李氏 菟喪地일 것이며 사위이신淳의 우리隋城崔氏 湖南의 토상지이기도 하느니라.
헌데 우리隋城崔氏 湖南의世系를 전국 출판사에서 발간한 족보에 의하면 어떤 분파도[居涇]系라 되어 있어"絶句"언제─누구가─우리賜姓한隋城崔氏 湖南의子孫을本來 水原崔氏 十世[居涇]子孫으로 둔갑시켰을까? 천벌을 줄만한 못된 것을 돈받고 안받고 간에 출판사나水原崔氏門中으로 건네 준 어두운邪學子孫은 누구인고!!他姓 靈魂을 붙잡아 놓고禍가 우리門中 子孫들에 번지지 않도록 풀붙여 금줄치고 물꼬를 단단히 막아내려야 하겠구나 그려─
[길은 물어서 가렸다]하겠노라.[모르면서도 아는체한 눈치로 꽈오?]라 하지 말게나─까마귀소리[꽈오?]란 바로過誤라니까 그려!아아!洛南始祖이신中直大夫 敎 淳의初體碑(1489立)를三次나 거듭改碑하여湖南 行列로[炳]자가淳(17세손)이라 새겨놓은漢學子孫은 누군가!내가設竪한長明燈에[十八世孫 炳完]이라 한刻字를[十七世]로 고쳐야 한다고 우기고 악착을 부린 불손한 자손은 누구여!祖上 歲祭에 모인門宗人앞에[十八世 炳完]은 틀렸고[十七世]라 떠들어 댄 천박한子孫은 또 누구며─또隋城伯文惠始祖 三世孫子로서三士 直諫派(士廉,士衡,士威는從兄弟)로知名하신李朝 三政丞을 낳은鳳巖先生[初諱 金氏 士威,開諱 隋城崔氏 元凱 崔兼 文武]는 훌륭한 우리祖上인지라─알아보지도 않고 탐진 최씨에서 따온[崔士威]아니냐고 중상 모욕한 못된傍孫은 어디있어!어디보자宗親會야!!네體質이 그래서야 되겠느냐!뭘 하는고─宗親會事務所도 갖추고,酒饌은 맡겨두고山寺도硏修도斷食도發想도新時代에 알맞게轉換해서崇祖愛族하며 자녀들의祖上에 대한 올바른認識,그리고子弟들의 사회진출에 이바지할 수 있는宗親會를文民時代에 알맞은運營으로 좀 더活性化시켜서 새 출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으로思惟하는 바이노라.따라서 내가匡師도講師도 되야 하겠소이다.
열거하자면 한정이 없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先代祖上께서는 교통 통신이未及한 시대였니라.우리上系字統이 호남에서 무려 삼백년이고 바로잡지 못하고 호랑이 담배먹고 딴판으로 단순한文字學譜선생님들을 원망해 뭣하리ㅡ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ㅡ현 정보화 시대에 낳은 자손들이 나서서 머리 맞대고 눈도 맞추고 입씨름도 대화도 해서 의리도 우애도 있게 한 뿌리 한 심혈로 다 맞춰봐야 하지 않겠소이까.─봉창을 터라!문턱을 넘어 보자!한 걸음 더 밖으로 나아가仁者樂山 知者樂水하고,산 넘어 물 건너宗會에 나가 소리쳐 징치고 활성화 하여 떡 먹고 고기 잡으러 나가봅시다.
그려!우리 족보가 나오면 외면하지 맙시다.우리 조상께서 나라도 위하고 크게 벼슬도 하셔 공신도 정승도 신선도 스승도 계셨으니憂國 士林할 것 없이 억울하게 몰리고 귀양가고 은신,녹권박탈,사사하신 조상도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다 계셨을텐데 집안에 흠이 생겼다 하여 고의로 은폐하고 삭제하여正誤가 뒤바뀐 채 이지만 맞춰 펴낸 족보가 태반인지라萬姓 大同小異하느니라.
이조에 와서隋城을 갈아 없애고水原이라地名했기로本來水原崔氏와賜姓崔氏 湖南이 어쩐지分揀을 못하고두崔氏 上系 六位靈魂이 똑같어,─허허!어이없어─쌍둥이祖上인가보다.어리둥절 말이 막혔어라.남 앞에族譜도祖上도 내보이지도 자랑도 못하고 감춰야 할 지경이니─어매!기가 죽어간다.수치스러워라.지게도 못지고 활개도 제대로 못피어 비우도 없어라 하니 머리가 빙빙돌아 뒷짐만 지고 물러가야 할世子孫들이 안타까워라 하겠노라.
여봐라!족보야!어서 오너라!우리隋城崔門의 거룩하신祖上의 별도 많고 총총하여 빛나는 훌륭한功業績을賢明한 우리子孫들에 서슴없이垂簾해 주소서.
엉클어진 실오라기처럼宗統의端緖를 잡지 못해 오리무중에서 방황하는 우리湖南의 뜻있는子孫들이여!주책없이 우물쭈물 거리고만 있지 말고 엉클어진 수수께끼 풀어낸 장본인 내따라 바라하다 싶이 대담하게 우리-우리隋城崔氏大同撰修世譜묶어보세.
그리하여 거듭 재창하거니와汎京湖 大宗會 次元으로 즉[隋城崔氏大宗財團]도創設하여向學 留學 子弟들의 재정 지원과 사회진출 하는善良子弟들을聲援도 하고金援도 해서門宗中의 인재 배출에 이바지 하고저提起하여 마지 않겠노라.
所謂 留守公派이신湖南 五派子孫에게原호에게 호소합니다
일일이尋訪하여 뵙고 무릅을 맞대고 주찬으로 의견을 나누고저 하오나 우선 서면을 통해 말씀드리고저합니다.
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湖南에서 그릇된宗統을 갈팡질팡 하고만 있었기에留守公派로連系하신 선대에서[이대로 가서는水原崔哥가 되어버리겠다]하시어連系지어 명실공히隋城崔氏로爲先盡誠하신愛族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내 일개 족장으로서 우리湖南子孫들에게 기리團合하여世紀的우리撰修世譜를發刊하는데 빠짐없이參與해 주실 것을千萬바라마지 않겠습니다.
따라서정통(正統)으로 연계(連系)지어 주시는데 있어[본래 수원최씨(本來 水原崔氏)] 10세손(十世孫) [거경(居涇)]을 우리 수성최씨조상(隋城崔氏祖上)으로 초휘(初諱)니 개휘(改諱)니 아호(雅號)이다 한 종통연계(宗統連系)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註)수원 등지에서 지금도崔씨를 찾으면崔 婁伯자손인水原崔씨 집안을 가르쳐 주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경주金씨에서賜姓한隋城崔氏]라 해도[그런崔씨가 있었던가?]하는 말이 돌아온다. 수원최씨와 혼동이 없도록 하는데는[경주김씨 하고는 결혼을 못한다]는 구전을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다.
4.中直公 墓碑의考察[注#2]湖南 一世祖 中直公 淳의改碑 前 舊陰記에[果川世居]라 하여[弘治己酉 淸明立]이라면成宗20年(1489) 3月인지라[武肅公家廟立議]보다159년 전일 것이다. 그런데武肅公께서는 우리洛南始祖이신[有椿] [中直公 淳]에 대한仔細한言及을回避하신 것을 보면碑文까지默過한 사실을 우리가重視해야 할 것이다. <隱蔽,廻避 文句>벼슬하신兩班家門으로서自存心과體面上으로當然히隱蔽하셨으리라.果川이라면隋城伯文惠始祖의緣故地 水原에서北쪽三千里에位置한 곳이요中直公 誕生(西紀1447年)한祖考妣一族이避身 隱居한 곳이라 할 것이다.따라서文惠始祖 五世孫水山께서 그 후로 풀려나서西記1450年代前後로知安山郡事로 계셨으니安山은果川縣界 五里밖에 안되는 거리로 현安山市이다.(註)知郡事公 水山의先妣는長水黃氏이니外戚에[黃喜政丞]이 계셨다는事實을銘記하노라.(戊辰年霜月에成馬 炳完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