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이곳 춘천시 서면 가덕산 삿갓봉 중턱에 자리 잡은 원통산은수성최씨 9세 첨악공 최세용 선생의 영혼과 후손들의 영혼이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중시조 9세 첨악공 최세용 선생은 경순왕의 후손이시다.
수성최씨 시조 휘 영규 시호 문혜공은 본성이 신라김씨, 경주김씨, 안동김씨로 이어 내려오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충렬왕 28년 1302년 수주 지금의 수원을 선치하신 공이 높다하여 최씨로 사성 하시고 수성 백으로 봉 하심으로써 수성최씨가 시작된 것이다.
파시조 6세 찬성공 유항께서는1432년 출생하시어 무과에급제하였으며, (증) 이조판서에 증직 되셨으며, 첨악공 최세용은 1509년 시은공 최숭한 선생의 八자 중 四자로 태어나성리학을 공부하셨으며,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와를 겪으시면서 부친의 유훈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에 가족과 여러 일가를 거느리고 춘천으로 피난 와서 모애와 고탄으로 다니시며 기미를 보고 대처함으로 한 사람도 자식을 잃은 자가 없이 지내며 많은 친지가 돌아와 의지하니난리후 공께서도 서면 서상리에 거택을 장만하고 학자 문인으로은자의 삶을 살았다.
보라! 유구한 역사와 경순왕의 후예로서 선조들의 빛나는 업적을 이어받은 첨악공 최세용 선생은 양반의 가문으로서 역사와 전통이 이어오는 동안 10세 양호공 급은 생원에 등과하시고 13세 태후는 대과에 등과하시고 병조 좌랑을역임하셨으며, 13세 서호공 태동은 생원에 등과 하셨으며, 14세 경은 생원에 등과하시고 15세 내암공 좌해는 학자 문인으로 활약하였으며, 16세 향설재공 내수는 생원에 등과하시고 구일전을 이시한에 서문을 쓰게 하였으며, 16세 동화공 윤수는 진사에 등과하시고 17세 사성재공 광련은 생원에 등과하시고 찬성공 파보 전 기유보를 편찬하셨으며, 18세 매초공 재성은 생원에 등과하시고 123년이 지난 후 구일전이 손실될 것을 우려하여 춘천 부사를 지낸 한진계에게 새로이 서문을 부탁하고 新 구일전을 편찬하여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가덕산 삿갓봉의 정기를 받아 많은 인재가 탄생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수성최씨 대동보 족보기록과 『구일전』 『춘천시 수춘지』 『향토문화유산총람』에 등재되어 후세에 전해오고 있으며, 첨악공후손들이해마다 음력 10월 5일 첨악재 사당에서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으며, 원통산에 영면하고 계시는 조상신과 첨악공 묘원에 영면하고 계시는 조상신께서 굽어살펴 주신다는 신념을 갖고 이글의 교훈을 깊이 새기며 오랜 세월 영원하리라.
2024년 4월 30일
글쓴이 : 수성최씨시은공파종중 회장 율문. 최관혁
수성최씨 첨악공파종중 묘원 신도비
(隋城崔氏 瞻嶽公派宗中 墓園 神道碑)
첨악공 묘원 신도비문(원본3200자용)
아 ~ 이곳 춘천시(春川市) 서면(西面) 가덕산(加德山) 삿갓봉 중턱에 자리 잡은 (원통산(元通山)은수성최씨(隋城崔公) 9세 첨악공(瞻嶽公) 최세용(崔世龍) 선생의 영혼(英魂)과 후손들의 영혼(英魂)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곳이다.
이 산(山)의 전설(傳說)로 유명한 정승이 춘천(春川) 지방(地方)에 조상의 묘(墓) 명당(明堂)자리를 찾기 위하여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地官)에게 봉의산(鳳儀山)에서 비둘기 3마리를 날리도록 하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삿갓봉 아래로 날아가 앉음으로 가덕산 줄기를 따라 명당자리를 찾아 내려오던 중 이미 최씨(崔氏) 집안에서 상여(喪輿)에 회 닿는 소리가 나므로 “아차! 한발 늦었구나!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하며 주먹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에 주먹 자리가 새겨진 전설(傳說)로 원통산(元通山)이라 불리어 전해오고 있다.
중시조(中始祖) 9세 첨악공(瞻嶽公) 최세용(崔世龍) 선생의 뿌리는 시조(始祖) 문혜공(文惠公) 경순왕의 후손이시다.
수성최씨(隋城崔氏) 시조 휘(諱) 영규(永奎) 시호(諡號) 문혜공(文惠公)은 본성(本姓)이 신라김씨(金氏) 경주김씨(慶州 金氏) 안동김씨(安東 金氏)로 이어 내려오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고종 조에 탄생하시어 원종 조에 등과(登科)하시고 충렬왕 28년(1302년) 임인(壬寅)년에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을 선치(善治)하신 공이 높다 하여 최(崔) 씨로 사성(賜姓)하시고 수성백(隋城伯)으로 봉(封) 하심으로써 수성최씨(隋城崔氏)가 시작된 것이다.
파시조(派始祖) 증조부(曾祖父)이신 6세 찬성공(贊成公)유항(有恒)께서는 1432년 출생하시어 무과(武科)에급제(及第)하였으며, 관직(官職)으로서 사정, 현감, 판관, 만 호, 목사를 역임하셨으며,(증) 이조판서에 증직 되셨으며,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여생(餘生)을 책으로 소일하다가 1486年 9月 24日 향년 54세 일기로 졸(卒)하시다.
부친(父親)이신 8세 시은공(市隱公) 숭한(崇漢)께서는1480년 출생하시어 성리학( 性理學)을 공부하시고 사림(士林)의 길을 택하시고 조선 시대 중종 14년 기묘사화을 겪으시면서 자손들의 안위를 걱정하시고 자식들에게 공(公)이 임종(臨終)할 때에 아드님 팔 형제분에게 유교(遺敎) 하기를 아무것도 끼쳐 줄 것이 없으나 다만 문인(文人)으로서 좋아하던 것이 선성(先聖)의 글뿐이라 수많은 서적이 있어 나누어 주는 것이니 너희들의 사업이 모두 이 책 속에 있느니라. 공(公)의 전통을 계승(繼承)한 까닭이다.
중시조(中始祖) 9세 첨악공(瞻嶽公) 최세용(崔世龍)은 1509년 시은(市隱) 숭한(崇漢) 선생의 팔자(八子) 중 사자(四子)로 태어나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며 부친의 유훈(遺訓)에 따라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가족과 여러 일가를 거느리고 춘천으로 피난 와서모애(慕崖)와 고탄으로 다니시며 기미를 보고 대처하므로 한 사람도 자식을 잃은 자가 없이 지내며 많은 친지가 돌아와 의지하니 난리 후 공(公)께서도 서면 서상리에 거택을 장만하고 정북창(鄭北窓) 염(廉)의 정신을 사모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학자(學者) 문인(文人)으로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보라~ 유구(悠久)한 역사와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서 선조들의 빛나는 업적(業績)을 이어받은중시조(中始祖) 9세 첨악공(瞻嶽公) 최세용(崔世龍) 선생은 부친의 유훈(遺訓)에 따라 은자(隱者)의 길을 택한 후손들이 양반(兩班)의 가문(家門)으로서 역사와 전통이 이어 오는 동안 10세 양호공(楊湖公) 급(汲)은 선조(宣祖) 22년 1589년 생원(生員) 소과에 등과(登科)한 뒤에는 학문(學問)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邁進)하였으며, 11세 궐산공(蕨山公)길원(吉元)과 금성공(金城公) 흥원(興元) 형제는 성리학(性理學) 학문을 배우면서 대대로 문학(文學)이 끊이지 아니하는 것은 다 공(公)의 유풍(遺風) 여력(餘力)인가 하더라. 13세 태후(泰厚)는 대과(大科) 1690년에 등과(登科) 한 후 병조 좌랑을 역임하셨으며, 13세 서호공(西湖公) 태동(泰東)은 생원(生員) 1693년에 등과(登科)하셨으며, 14세 경(炅)은 생원(生員) 1740년에 등과(登科)하시고 15세 내암공(乃庵公) 좌해(左海)는 학자(學者) 문인으로 활약하며 가문을 빛냈으며, 16세 향설재(香雪齋)公 내수(乃秀)는 생원(生員) 1783년에 등과(登科)하시고 최초의『구일전』을 셋째 사위 이시한(李是釬)에 서문(序文)을 쓰게 하였으며, 16세 동화(東華)公 윤수(胤秀)는 진사(進士) 1805년에 등과(登科)하시고 17세 사성재(思誠齋)公 광련(光鍊)은 생원(生員) 1861년에 등과(登科)하시고 찬성(贊成)公 파보 전 기유보(1849년)를 편찬하셨으며, 18세 매초(梅樵)公 재성(在聲)은 생원(生員) 1885년에 등과(登科)하시고 123년이 지난 후 『구일전』이 손실될 것을 우려하여 1872년 춘천 부사를 지낸 한진계(韓鎭棨)에게 새로이 서문(序文)을 부탁하고 新『구일전』을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종씨 어른 17세 일재(逸齋)公 광규(光珪)와 종재 18세 재봉(在鵬)과 더불어 인쇄하여 종인들께 나누어 주었으며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세 심농(心農)公 순현(舜鉉)은 후 기유보(後 己酉譜) 1910년에 편찬하셨으며, 19세 양재(養齋)公 혁현(爀鉉)은 1957년 정유보(丁酉譜)를 편찬하셨으며, 20세 석천(石泉)公 순횡(淳鑅)은 진사(進士)1894년에 등과하시고 20세 인순(仁淳)은 강원도 종친회와 첨악공종중 1987년에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셨으며, 21세 송헌(松軒)公 기천(基千)은 대종회 부회장,찬성공파(贊成公)派宗中 시은공(市隱公) 宗中 1987년에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셨으며, 21세 부이사관 형문(馨聞)은 기축보를 2009년에 편찬하셨으며, 22세 인화(仁和)는 3대 회장과 대종회 이사를 역임하셨으며, 22세 건화(建和)는 2013년 4대 회장 재임 당시 시은공파종중에서 3억 5천만 원 지원받은 자금으로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건립하였으며, 22세 율문(栗文)公 관혁(寬爀)은 대종회 상임이사, 찬성공파 6대 회장, 시은공파종중 7대회장을 역임하셨으며 광혁(廣爀) 대종회 감사 겸 총무와 같이 수성최씨(隋城崔氏) 홈페이지 전자족보 편찬위원으로 갑진(甲辰)보 2024년부터 편찬하셨으며, 23세 승근(承根)은 5대 회장 재임 당시 상가건물을 매입하였으며, 23세 승만(承萬)은 2024년 6대 회장 재임 당시 시은공파종중에서 3억원 지원받은 자금으로 첨악공 묘원(墓園)을 조성(造成)하고 준공(竣工)하였으며, 시은공파종중 7대 회장 재임 2021년 당시 율문(栗文)公 관혁(寬爀)과 총무이사 우생(又生)公 덕희(德喜)는 공동으로 찬성공, 자앙공, 행장(行狀) 서문(序文)을 쓰고 편찬하셨으며 방촌공, 시은공, 첨악공, 양호공, 권산공, 후헌공 행장(行狀)을 수정편찬 하였으며,2024년 첨악공파종중(瞻嶽公派宗中) 묘원(墓園) 신도비(神道碑)의 비문(碑文)을쓰고 기록 함으로써 영원토록 후세(後世)에 전(傳)해지기 원하노라.
가덕산 삿갓봉의 정기를 받아 많은 인재가 탄생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수성최씨 대동보 족보기록과 구일전『九逸傳』 춘천시 수춘지『壽春誌』 『향토문화유산총람』『자하 신위의 맥 록』『조선 시대 춘천 문인들』에 등재되어 후세에 전해오고 있으며, 첨악공(瞻嶽公) 후손들이해마다 음력 10월 05일 첨악재(瞻嶽齋) 사당(祠堂)에서 세일사(歲一事)를 봉행(奉行)하고 있으며, 평소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기간의 우애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은 원통산에 영면하고 계시는 조상신과 첨악공(瞻嶽公) 묘원(墓園)에 영면(永眠)하고 계시는 조상신께서 굽어살펴 주신다는 신념(信念)을 갖고 이글의 교훈(敎訓)을 깊이 새기며 오랜 세월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