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께서는 문장(文章)과 재덕(才德)이 탁월(卓越)하시어 고려 원종(元宗) 2년 신유[辛酉:1261]에 문과(文科)에 오르셔서 숭록대부(崇祿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 남부전서(南部典書)로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시고, 서경(西京)의 유수(留守)로 계시면서 휼륭한 방법으로 교도(敎導)하여 문화(文化)가 크게 일어났으며, 원종왕(元宗王)은 공(公)을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으로 대접하시어 사신(史臣)이 명현(名賢)등의 말로 기록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품자(禀資)의 탁월(卓越)하심과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시며 문장(文章)이 당세(當世)에 떨치셨다.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에 수주(水州) 지역에 풍속(風俗)이 퇴폐(頹廢)하고 윤상(倫常)이 혼매(昏昧)하므로 왕이 심히 근심하시니 공(公)께서 자청(自請)하여 수주(水州)에 부임하시어 백성들에게 충효(忠孝)의 책무(責務)를 가르치고 인의(仁義)로 인도(引導)하여 일년(一年)이 못되어 윤리(倫理)와 풍속(風俗)이 크게 변화하고 효제지향(孝悌之鄕)으로 화하니, 왕이 가상(嘉賞)히 여기시어 충렬왕(忠烈王) 28년 임인[壬寅:1302]에 그 공덕(功德)이 높아 최(崔)로 사성(賜姓)하시고 수성백(隋城伯)으로 봉(封)하시니 수성최씨(隋城崔氏)가 비로소 시작 되었다.
후에 호남 안무사(湖南 按撫使)로 나가셨다가 졸(卒)하시니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로 내려주셨다.
수주(水州)의 백성들이 공(公)의 덕의(德義)를 흠모하여 스스로 어량천(魚良川) 삼봉산(三峯山) 아래 병좌원(丙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고 매년 절일(節日)에 관리(官吏)들이 제사를 올리니 그때에 윤시랑(尹侍郞) 보(普)의 애사(哀詞)에 찬양(讚揚)을 극진히 하였다.
아... 이곳 수원(水原)의 삼봉산(三峰山) 병좌원(丙坐原)은 곧 고려(高麗) 수성백(隋城伯 최공(崔公)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 앞의 한쪽 상석(床石)이 오히려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이 자리임을 알게 하고 있으나, 유적(遺跡)의 기록이 없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 자손(子孫)들이 있으면서 정성으로 받들었으나 또한 증험(證驗)이 없으니 수백년(數百年)이 흐른 오늘 그 없어진 것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제 공(公)의 후손(後孫)이 그 내외족(內外族)의 계보(系譜)에 실려 있는 것을 널리 참고하여 하나로 모아 나에게 보이니 이것이 오히려 영원토록 후세(後世)에 알리는 것이다.
공(公)의 휘(諱)는 영규(永奎)시니 원종(元宗) 2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이 되시고, 서경(西京)에 유수(留守)로 계시면서, 옳은 방법으로 교도(敎導)하시니 유교(儒敎)의 문화(文化)가 크게 일어났다.
충렬왕(忠烈王)때에 수주(水州)지역이 풍속(風俗)이 퇴폐(頹廢)하고, 윤상(倫常)이 혼매(昏昧)하므로 왕(王)이 심히 근심하시거늘 공(公)께서 지위(地位)와 명망(名望)이 크심에도 문교(文敎)로써 퇴폐(頹廢)된 풍속을 바로 잡고자 호장(戶長)이 될 것을 자청(自請)하시어 백성에게 충효(忠孝)의 책무(責務)로써 가르치신지 기년(朞年)도 못되어 윤리(倫理)와 풍속이 크게 변하니 왕(王)이 가상히 여기시어 28년 임인(壬寅)에 그 공덕(功德)이 높음을 최(崔)로써 사성(賜姓)하시고, 백(伯)으로써 작위(爵位)를 봉(封)하시며, 숭록관전서(崇祿官典書)로 계급(階級)하시고, 후에 호남안무사(湖南按撫使)로 나가셨다가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로 내려주셨다.
수주(水州)의 백성들이 공의 덕의(德義)를 흠모하여 돌아가심에 각자 힘을 합하여 묘지(墓地)를 가리어 장사(葬事)하고, 매년 절일(節日)에 관리(官吏)들이 제사를 올리니 그때에 윤시랑(尹侍郞) 보(普)의 애사(哀詞)에 찬양을 극진히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