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 8년(갑진년)에 시중공의 지석과 평장사공 소보공 두 분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니 대개 남의 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석을 파묻어 숨겼더니 지금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여러 일가들이 모여서 그 지석의 글을 읽어보고 서로 의혹이 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이 지석 때문에 족보의 미비했던 계통을 참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조상의 혼령의 도움으로서 자손의 다행인 것이 아니겠는가나(사목)의 증고부 효간공께서 족보의 일을 시작하던 것을 부친께서 계속 물려주셨으니 내가 어찌 두려워만 하여서 사양하겠는가.
그 지석 한 쪽 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 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 은열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라고 하였다.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세하게 참고 할 뜻이 있어 다시 묘소 위로부터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을 캐어내니 그 한 쪽 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려평장사 김 황을 아우 시중시랑 김 은열의 묘소에 이어서 안장하였으며 경순왕의 둘째아들과 넷째아들이 고려 태조의 외손이며 공신으로서 특별한 장지를 성 북쪽 10리 오룡산 남쪽기슭 30리 주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그 한 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7세손 검교 태자소보 김경보로서 부친은 공부시랑 휘 한공이요, 조부는 추봉공부상서 휘 계삼이요, 외조부는 예부원외랑 김 태기이며 공의 나이 82세로 대금나라 황룡 10년(경오년) 4월 17일(계해일)에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시어 7월 17일(을유일)로써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며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 비어대 휘 작문이요,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 내금사 윤유연이요,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 유면이다. 고 하였다.
또는 시중공 바로 북쪽 다섯 걸음 거리에서 지석 1개를 캐내니 그 지석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평장사 보국대안군 은열의 묘이니 성 북쪽 10리바깥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안은 형국)임좌 병향이다. 라고 하였으니 앞의 지석 두면의 뒤에 얻은 지석 1개로써 증거한다면 시중시랑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그 형제 차례와 그 아들의 벼슬과 이름도 밝혀졌으며 다음 한쪽으로 본다면 공부상서공의 위와 강릉군의 아래에 다시 2대수가 의당 있어야 하겠는데 상서공의 휘자도 족보와는 같지 아니하며 또는 모든 지석에 작호가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니 대개 족보의 미비한 것은 의심할 수 있으되 지석의 문자는 실로 믿을 만한 일이므로 이제 바로 족보의 기록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서공위 2대수가 증거할 문헌이 없고 경순왕과 평장사공 휘(인위)의 연대가 너무 가까운 것이 더욱 의심나는 것은 역시 모두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따로 기록을 하여서 후대를 기다려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는 감히 경순왕 이하 세대차례를 가로로 쓰고 아울러 그 자손을 기록하여 한 가지 예규를 만들어 미비한 족보 옛날기록 아래에 붙인 다음에야 지석과 족보가 서로 증거가 되어 신중성이 있을 것이니 의심과 신빈성이 각각 전해지면서 중복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여러 일가의 중론을 따른 것이로되 다만 옛날 기록이나 또는 어떤 족보에는 시중시랑의 성과 이름위에 삼녀라는 글자가 있고 또는 공부상서 휘자 위에 자를 썼으니 이것은 옳지 않으나 아직 옛 것대로 보존하였다.
지금에 지석을 씻어서 그 내용을 모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후손 사목은 삼가 기록함. 시중공 묘소 오른쪽에 또 큼직한 하나의 무덤이 있으니 그 둘러쌓은 담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건데 뚜렷하게 특이한 무덤으로서 한 구역 내에 똑같은 형체로써 그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은 모두 부녀자의 화장 기구이므로 그의 부인인 것 같으나 지석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어서 아직 부록으로 뒤에 증거할 자료로 하였다.
가보를 살펴본다면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누락된 대수가 있다고 종중의 전해오는 말이 있으나 그 사이에 몇 대인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지금에 청주족보에는 공부시랑 은열이 경순왕의 셋째아들로서 5대를 전하여 휘 영고에 이르러서 직접 평장사로 전해 이은 차례를 삼았으니 어떤 근거에서 인지는 알 수 없으며 경순왕 이전 세대가 벌써 사기와 서로 부합되니 이 5대라는 것이 착오될 이치가 없는데 다만 의심할 곳은 경순왕이 본래에 고려태조와 같은 세대에서 경종임금 3년(무인년)에 상사가 났으며 평장사공이 현종 15년(갑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더니 지금의 평장사공이 벼슬 그만둔 것이 비록 70년대인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개 벼슬 그만둔 것이 늙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년으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광종 67년 을묘 년 병진 년 사이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상사난 해에 평장사공의 나이 벌써 이십사오 세가 되었을 것이니 비록 소목(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맨 위 첫째 중앙에 시조를 모시고 왼쪽은 소=2,4,6,8, 오른쪽 목=3,5,9])을 따져서 부자지간이거나 혹은 조손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대에 혹 나이 8~90세 45대 손자를 보게도 되나 여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족보에서 벌써 낙랑공주가 낳은 은열의 출생이 그 다음해인 정유, 무술년 사이라면 이때로부터 평장사공의 출생년도(을묘,병진년)가 불과 18,9년이니 그간에 어찌 45대가 될 수 있겠느냐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 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 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 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기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지금 평장사공에서 경순왕까지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것을 알만한데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연대가 멀다고 하며 대수가 탈락되었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문서에 증거할 것이 없어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또는 고려가 열전을 참고하건데 명종 때에 영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등성 김인경의 부친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연대가 어긋나므로 혹시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족보계통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초에 신중하여야 하겠으되 족보에 기록된 것이 이렇게 모순되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며 나중에 족질 휘 여의 가승(한 집안의 기록)을 보건데 휘 순웅이 실로 평장사공의 부친이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순웅의 아들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여러 일가가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 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아울러 기록해 놓으니 평장사공 위에 이런 장군공의 1대수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경순왕 년대에 소급해보면 더욱 가까운 것이니 여기에 5대수라는 것은 아직 부록으로 하여서 후일에 다시 참고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장사공 23세손 덕운은 삼가 기록함.
임진년 족보를 살피건대 경순왕 이하 족보 탈락한 것은 다만 여러 기록에 어긋나는 말을 증거로 의문점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정조임금 갑진년에 시중공소보공의 지석을 발견하여 비로소 선대계통을 알았으므로 지금에 구족보의 기록을 수정하였으며 경헌공은 추가로 기록하며 구족 보에서 일가 덕운이 기록한 것을 작은 글씨 두 줄로 아래에 써서 참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