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동은 송탄출장소와 점촌 사이의 마을이다. 고려시대 송탄출장소 부근에는 지장사라는 절과 마을이 있었는데 이 절이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조선 후기 본래 위치에서 300여 미터 아래에 절을 중건하였고 나중에 마을도 함께 옮겨오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마을도 도시개발과 신흥 주택단지 건설로 옛 마을의 흔적은 희미하며 지장초등학교라는 이름만이 옛 추억을 더듬게 한다.
적봉리는 사실 사거리나 신흥마을과 문화권이 다르다. 이 마을은 토착민 동네일 뿐 아니라 생활권도 장등리, 두릉리, 금각리와 같은 권역이고 초등학교도 대부분 금각초등학교를 다녔다.
옛 송탄시가 출범하면서 사거리와 길 하나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편입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감안하여 고덕면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군기지에 밀리고 세월에 차이고 서정동 답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부대정문에서 사거리로 넘어오는 고갯마루에서 만난 고만복(70세)씨는 경기도 문산 미 수복지구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 피난민의 생활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살기 위해 평택에 내려왔다가 나중에는 미군부대에 의지하면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아 정착한 경우였다. 하지만 배운 것이 짧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몸으로 하는 노동일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 뿐 아니라 자녀들 교육도 변변치 않아 이제 겨우 제 밥벌이를 할 정도라며 한숨을 쉬었다.
사거리 슈퍼주인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피난 온 실향민 2세였다. 내가 '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이군요'라고 말했더니 빙긋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50대 초반인 이 분은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터라 6.25전쟁부터 지금까지의 변화과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1950년대 풍경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그 때는 부대 정문에서 넘어오는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신흥동, 사거리, 적봉리, 복창동 등에 마을이 있었는데 대부분 판자집이거나 루삥지붕이었다고 한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피난민들은 지주였거나 지식인출신이 많아서 미군부대를 끼고 부대물건으로 장사를 하거나 통역 등으로 금세 형편이 나아졌다. 교육열도 높아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반에서도 동령이나 이충동 같은 농촌아이들보다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이 훨씬 좋았다고 한다. 이 시절 부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창고였다. 부대는 마을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했으며 아이들에게는 군것질 거리나 장난감을 얻는 장소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까까운 길을 놔두고 일부러 부대방향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야만 뭔가 하나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 속에서만 들어왔던 "기브 미 쵸콜릿, 기브 미 츄잉껌"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어느새 5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적봉리는 눈물과 한이 서린 마을이다. 부대 담장 옆 산등성이에 달동네를 이루고 사는 이 마을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붉은 황토마루 기슭에 40여 호의 집들이 모여 사는 평온한 동네였다. 그러던 것이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미군기지는 수 백년 동안 살아온 고향집과 산과 들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이들을 쫓아냈다. 지금처럼 보상과 이주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어야 되는 것이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에 돈 있는 사람들은 아예 고향을 등졌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던 사람들은 부대 동쪽 나무내(목천)와 마을 뒷산 기슭에 나누어 이주하였다. 이주한 사람들에게 정부는 두 집에 한 동 씩 텐트를 쳐주고는 손을 털었다. 그 흔한 구호물자도 없었다. 텐트에서의 생활도 힘들었지만, 집과 땅을 빼앗긴 처지에 살아갈 길이 막막한 건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이 같은 고통을 두 번이나 더 겪어야 했다. 그것은 부러진 팔을 다시 부러뜨리는 야만적 행위였다. 그럼에도 소처럼 눈을 끔벅이며 정부의 정책에 순응했는데, 이번에 최후 통첩이 날아들었다. 미군부대를 확장하겠으니 나가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옛 주민들이 이주했던 마을만. 보상과 이주대책이 좋아진 세상이 되었지만 이들이 받을 보상은 거의 없다고 했다.
살고 있는 땅이 남의 종중산이기 때문이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에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평택시민신문 2002-08-30 (143 호)
신장1,2동
신장1동 구장터 ▷
1.기지촌의 여운과 쇼핑몰의 활력이 공존하는 곳 송탄하면 미군기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 곳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1952년 6.25전쟁 중이었다.
미군기지는 토착민들에게 고향을 상실하는 아픔을 주었지만 피난민과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터전이었다. 꾸역꾸역 모여든 사람들은 미군기지 정문을 중심으로 기지촌을 형성하였다.
50년대나 60년대 가난한 민중들에게 기지촌은 엘도라도였다. 좀 배운 사람들은 부대에 취직해서 통역이나 사무직, 하다 못해 잡역부라도 해서 먹고살았고, 장사수완이 있던 사람들은 부대물건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부대 앞에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술집과 사창가도 형성되었다. 다양한 군상들이 모인 도시는 밤이면 흥청대다가 낮이 되면 김민기의 "기지촌"이라는 노래만큼이나 스산했다.
신장동은 경부선 철길을 경계로 숯고개와 나뉜다. 이 철길은 동네와 동네 뿐 아니라 미군부대지역과 옛 농촌지역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다. 생경한 느낌의 부대주변과 옛 지역의 연결고리는 신장육교였다. 근자에는 신장육교보다 커다란 고가도로가 여러 개 생겼지만 척박했던 6, 70년대 신장육교는 경이로운 볼거리였다.
이 육교를 건너면 농촌풍경은 사라지고 흰색, 검정색의 피부를 가진 외국인과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잡았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공간 이동이었다. 그 세계에는 번쩍번쩍하는 간판들, 헐렁한 군복바지, 쵸콜릿, 츄잉껌, 햄, 소세지, 치즈같은 물건들이 넘쳤다. 그래서 비행기 소음이 있어도, 고도제한을 당해도, 미군들이 행패를 부려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인내심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7, 80년대 경제개발로 미군들이 흘리는 달러의 위력이 감소하고,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미군부대와 미군은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부대 앞에서 몇 십 년 씩 장사하는 상인들도 이제는 미군보고 장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 가게 안에서 물건을 고르던 몇 몇 사람들도 전부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쇼핑몰을 정비한 것을 반가워했다.
2.새 시장이 있어 신장동(新場洞) 신장동은 일제강점기 전에는 탄현면이었고, 갑오, 을미개혁 때는 일탄면과 이탄면이었다. 이시기 신장동에는 남산과 진위천을 중심으로 구장터, 나무내(목천), 제역동(제골), 남산터(지골)같은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
구장터는 옛 장터가 있던 마을이다. 19세기 말 일탄면 시절에는 면(面)의 중심이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마을의 모양과 골목길의 형태 그리고 길 좌우로 늘어선 집들의 모양이 옛 장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터는 육로나 수로교통과 관련이 깊다. 구장터 마을 옆에는 진위천이 흐르고 냇가에는 나루가 있었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에는 조수(潮水)가 구장터 옆을 지나 오산천을 타고 갈곶리 부근까지 올라갔다. 물길이 열린 곳으로 소금과 새우젓을 실은 배들이 왕래하였고 각종 물화가 교역되었다. 하지만 구장터의 영화는 구한말 장터가 봉남리로 옮겨가면서 시들해졌다. 봉남리로 갔던 장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경부선 서정역이 생기면서 서정리역 앞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서정시장이다.
시장이 옮겨간 뒤 수 십 년이 지나고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지금의 중앙시장통에 시장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시장을 "새시장"이라고 불렀고 한자로 "신장(新場)"이라고 썼다. 새 시장은 처음 5일장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상권이 커지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지금은 대단위 쇼핑몰로 발전하였다.
나무내는 한자로 목천(木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나 근처 사람들 중에 목천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나무내"는 글자 그대로 "나무가 떠내려오는 냇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 옆에는 작은 내가 흐르는데, 장마철 냇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떠내려왔다. 땔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떠내려오는 나무는 귀한 재산이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건져 햇볕에 말려 땔감으로 썼다. 그래서 이 마을을 "나무내"라 불렀다.
미군부대 안으로 들어가버린 남산은 평택지역에서 정신사적으로 귀한 산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정치, 사회개혁을 외치던 16세기 중엽 이 곳에는 최수성이라는 인물이 살았다. 출생지는 강릉이었지만 8세에 진위현(평택)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곳출신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최수성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의리가 출중했던 터라 일찍부터 명현들의 가르침과 조광조, 김정, 최자반 등 명망 있는 젊은이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조광조와 김정은 일찍부터 출사하여 중종 때 개혁세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최수성은 정치입문에 뜻을 접고 스스로 북해거인 또는 경포산인이라 하며 남산 기슭 원정령의 원정이라는 누정에 칩거했다. 하지만 그의 칩거는 "산수에 묻혀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삶"이었다.
조광조의 개혁 당시 원정은 개혁세력의 결집장소였다.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남곤, 최세절같은 훈구세력의 미움을 샀다. 결국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뒤이어 일어난 신사무옥으로 최수성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최수성의 죽음은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되었다. 명분과 실력에서 앞섰던 사림파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실권장악은 기묘명현의 명예회복을 의미했다.
최수성은 율곡 이이의 건의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 같이 존귀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조상과 후손들의 격을 높여주고 사당과 묘를 조성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한다.
신장1동 제역동이라는 지명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유래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농민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役)을 면제해주고 대신 문정공 최수성의 묘와 사당을 관리하게 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작은 농촌이었던 이 마을도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 제역동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도시화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남산터 마을은 땅이 질어서 "지골"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지금도 전통마을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데, 골짜기이면서 부대 담장 귀퉁이에 자리잡아서 모양이 후줄근하다.
3.소나무가 많아 송월동, 그러면 밀월동은? 신장동은 신장육교를 중심으로 북쪽은 1동, 남쪽은 2동이다. 1동은 옛 마을들이 대부분이라면 2동은 6.25전쟁 후 새로 생긴 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 곳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었다. 그래서 밀월동에서 사거리와 적봉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참나무를 베어 숯을 만드는 가마들이 있었고 평탄지대에는 논밭이었다.
신장2동의 지명으로는 송월동과 밀월동이 있다. 송월동은 송신초등학교와 태광중, 고등학교 그리고 송탄역이 있는 지역이고, 밀월동은 송월동 서북쪽 경사지대다. 송월동이라는 지명은 소나무 송(松)자에 달 월(月)자를 쓰고 있어 "늘푸른 소나무 숲에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집들이 들어서기 전 이곳의 풍경은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달빛이라도 산 위에 보는 달빛과 움푹 꺼진 분지에서 보는 달빛이 다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지명에는 리얼리티보다는 일부러 멋스러움 낸 것 같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인위적인 냄새는 밀월동도 마찬가지다.
밀(密)자에는 소나무, 참나무가 빽빽했던 밀월동의 옛 모습이 떠오르게 하지만 이것도 어느 특정인의 손때가 뭍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거진 나무숲에 푸르게 비취는 달빛이라니 정말 낭만적이다. 하지만 송월동과 밀월동의지명이 멋있기는 하지만 그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내재되었다. 자고로 지명이란 사람들의 살 냄새, 땀 냄새가 깊이 베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장동 답사를 다녀오는 길에 한영애가 부른 "기지촌"을 듣는다. "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에, 창에 드리운 낡은 커튼 사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로 이어지는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동두천을 배경으로 만들었다는 이 노래가 신장동 하늘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같은 하늘을 이고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역설일까. 숯고개 너머로 지는 노을이 스산하다. - 평택시민신문 2002-09-07 (144 호)
송북동 세종때 재상 맹사성 소 타고 피리불며 지나던 거리 삼남대로
흰치고개 ▷
■삼남대로가 지나는 마을들 지금이나 옛날이나 평택지방은 교통의 요지이다. 나는 지금까지 평택의 옛길을 찾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고심했는데 최근에서야 어렴풋이 실마리를 찾았다.
평택의 옛길은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대부분 주요 교통로에서 밀려났다. 유천동에서 소사동 구간도 그렇고 배다리방죽에서 칠원동길, 칠원동에서 도일동과 흰치고개를 넘는 길, 동막 백현원에서 작은 흰치고개를 넘어 진위로 가는 길, 진위에서 견산리를 거쳐 오산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근대이후 평택처럼 옛 길이 철저히 무시된 지역은 없다. 그것은 옛길이 걸어서 공무를 수행하는 보발(步撥)을 고려하여 만들어졌고, 신작로는 철도교통이나 상공업발달을 생각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외면 당했던 삼남대로가 최근에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역사성과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할 수 있는 도일동에서 동막까지의 구간이 4차선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앞으로 동막에서 작은 흰치재를 넘어 진위면 봉남리까지 구간도 확장공사를 한다고 한다.
근대의 물결 속에 죽어 방치된 길보다 현재에도 적절히 활용되는 도로가 생명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화된 도로건설이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얼마나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얼마 전 도도로키라는 일본인이 쓴 삼남대로 답사기라는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은 대동지지와 춘향전을 중심으로 옛 길을 답사했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길까지 찾아내는 열성을 보여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오랫동안 큰 죄의식을 느꼈다. 누가 하든 상관없지만 어째든 이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인 지리학도가 찾아 헤맨 옛 길에 평택지방의 길과 문화유산이 정연하게 소개된 것을 읽고는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솔직한 고백하지만 나는 우리고장의 옛 길을 전부 답사한 적이 없다. 도도로키가 아름답다고 말했던 숲안말에서 동막 사이의 고개를 넘어보지도 못했다. 갈원(칠원) 주막에서 남편 잃은 주모의 육자배기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흰치고개 넘어 백현원으로 삼남대로 지나는 길에 흰치고개는 평택지방에서 가장 험하고 높은 고개였다. 지금은 고개턱을 절반이나 깎아 야트막해졌지만 공사하기 전에는 무시 못할 만큼 높았다. 더구나 부락산과 덕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와 계곡에는 심심찮게 산짐승이 출몰하였다. 그래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나그네는 고개를 넘기 전 도일동 감주거리(주막거리)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흰치는 국한문혼용 지명이다. 이 지명은 옛날 고개 봉우리가 석회질 토양이어서 희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흰치는 한자로 백현(白峴)이다. 한자와 한글의 차이일 뿐 백현이라는 지명은 흰치, 흰고개와 의미에서 같다. 안성천을 건너 평택 땅으로 넘어온 나그네가 땀에 범벅이 되어 휘적휘적 흰치고개를 넘으면 동막(東幕)과 우곡(牛谷)마을이 나왔다. 나그네는 이 곳에서 땀도 식히고 출출한 배도 채워야 했다. 때로는 봉놋방에서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다.
더구나 공무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원에게는 이 곳이 진위객관과 갈원의 중간이어서 다리 쉼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곳에 백현원이라는 역원을 설치하였다. 백현원은 설치 초기부터 나그네의 주요 쉼터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역원들이 옛 주막자리에 설치되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이곳은 주요 쉼터였을 것이다.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사연이 남기 마련이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고불 맹사성에 관한 고사가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공당문답이 그것이다. 잠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맹사성의 고향은 아산시 배방면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6백년이 넘는 그의 고택이 남아있다. 맹사성은 고향에 갈 때나 한양으로 올라갈 때 삼남대로를 지나갔다. 평소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고 했으니,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으면 배방면에서 백현원까지는 하루 길이었다. 한 번은 맹사성이 고향에 갔다가 한양으로 가던 중 비를 만나 백현원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주막 안에는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젊은이가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었다. 맹사성이 구석에 자리를 잡자 심심하던 젊은이는 장기 한판 두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맹사성이 연거푸 몇 판을 이기자 부아가난 젊은이는 유명한 공당문답을 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맹사성은 빙긋이 웃으며 응했다. "그래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공?, 한양으로 벼슬하러 간당, 벼슬자리 내어줄 사람이라도 있는 공?, 없당, 그럼 내가 한자리 마련해주면 어떻겠는 공?" 그러자 젊은이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라지도 않는 당"하고 대답했다. 나이 먹은 늙은이의 실없는 농담쯤으로 여겼던 탓이다.
얼마 후 과거가 끝난 뒤 급제자들이 정승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맹사성은 윗자리에 앉아 급제자들을 내려보고 있는데 그 중에 백현원에서 만났던 젊은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장난기가 발동한 맹사성은 "그래 과시는 잘 보았는 공?"하고 물었다. 깜짝 놀란 젊은이는 고개를 들어 맹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승이 앉는 자리에 백현원에서 자신이 놀렸던 꽤죄죄한 늙은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맹사성이 다시 물었다. "급제한 기분이 어떤 공?" 그러자 젊은이는 땅에 코를 박고 "죽 ~ 죽고만 싶당"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젊은 급제자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대신들에게 맹사성이 내막을 이야기하자 방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 못할 맹사성이 아니었다. 이 일로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는 그 후 크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동막(東幕)이라는 지명의 의미 동막은 송북동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고 규모도 아담해서 최근에는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동막(東幕)이라는 지명은 전국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는 지명이다.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는 황석영의 장길산에 자주 등장하는 마포 동막을 들 수 있다.
송탄시사에는 동막(東幕)의 유래를 "산이 동쪽으로 막(幕)처럼 둘러 쌓여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동막 동쪽으로는 덕암산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막을 치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지명에서 이 같은 이유로 지명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관아 동쪽이어서 동문, 서쪽이어서 서문밖, 감옥이 있어서 옥터골 같은 지명이 생긴 것처럼, 관아시설이나 특이한 나무, 사당, 주막과 같은 상징성이 있는 것들이 지명형성에 영향을 준다.
이처럼 동막도 막(幕)을 "막을 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다 "주막의 동쪽"이라는 듯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어느 쪽에서 동쪽일까? 동양에서의 방위는 궁궐이 중심이다. 지방의 경우 궁궐이 있는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거나 궐패를 모셔두는 "객사"가 중심일 수 있다. 동막은 북쪽에서 남쪽을 내려다볼 때 백현원 주막의 동쪽이 된다. 그래서 "동막(東幕)"이다.
전에 동막마을을 답사하면서 어이없는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마을 안에는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마침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래서 때는 지금이다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반갑게 맞이하면서 마을의 역사며 옛 모습,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구수하게 말해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을을 나오다가 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아버지가 한 분을 만나 몇 가지 궁금했던 사실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전에 말씀하신 분과 내용이 전혀 달라 이의를 제기했더니 이분 말씀이 느티나무 밑에서 만났던 분은 정신이상자라고 하였다. 그 때 느끼는 허탈감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밖에 안나온다.
동막 주변에는 다양한 지명들이 많다. 남쪽으로는 부락산 능선 따라 형성된 계곡마다 이름이 있고, 동북쪽으로 덕암산 줄기에 무수한 계곡과 고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백현원을 지난 삼남대로는 동막 서남쪽 염봉재를 옆으로 끼고 오룡동이나 숲안말로 넘어갔다. 숲안말 길이 샛뚝거리를 지나 봉남리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길로 관원들이나 장사꾼들, 자보러 가는 아낙들이 넘어 다녔다.
염봉은 소금 염(鹽)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옛날에는 "소금재"로 불렸을 것이다. "구행길골"은 이 지역의 옛길의 변화과정을 말해준다. 백현원을 지난 삼남대로가 봉남리로 넘어가는 길은 시대에 따라 숲안말 길, 오룡동 길, 오리골 길 등 다양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 숲안말 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길이 바뀌었는데 옛 길을 "구행길"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에서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큰길을 "행길"이라고 부르는데 행길은 "한길"에서 온 이름이다. 안성천이나 충남 대천을 한내라 하고 대전의 옛 이름이 한밭인 것과 같다.
■소(蘇)씨들이 살아서 소골이다 송북동 우곡마을은 본래 소(蘇)골이라 불렸던 마을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진주 소(蘇)씨의 동족마을이었다. 진주 소(蘇)씨는 고려시대부터 평택지방의 큰 성씨였다. 도일동 예좌울이나 칠괴동의 개척자도 소(蘇)씨였고, 원도일 마을에도 소(蘇)씨가 여럿이다. 이 같은 행적을 추적할 때 소(蘇)씨들은 고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송북동, 도일동, 칠원동 일대의 대 토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였던 소(蘇)씨 가문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분명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무인이었던 소흡같은 인물이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미루어 이와 같은 사실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지역을 호령하던 명문거족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모반에 가담하여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 토호가 모반에 가담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일은 쉽게 발설할 내용이 아니다. 비석을 세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더욱 힘들다.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멸문지화라는 것이다.
기록에 없는 일들이지만 민중들의 소망과 잇닿아 있는 사건은 설화나 전설로 남게된다. 그것이 민중의 힘이고 저항이다. 소골에는 진주 소(蘇)씨 가문의 멸문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소골마을 골짜기에 있는 "풀무골 전설"이 그것이다.
고려 공민왕(1360년 경) 때 소(蘇) 정승이라는 분이 살았다. 부락산 계곡 마을마다 그를 따르고 숭상하였다고 하니 힘께나 쓰는 토호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젊은 승려 신돈을 앞세워 원나라를 몰아내고 정치,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돈의 개혁은 친원파와 권문세족의 반발에 부딪쳤다. 소(蘇)정승도 신돈의 개혁에 반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돈을 제거하기 위하여 병사를 모집하고 불악산 골짜기에 대장간을 만들어 놓고 병장기를 만들며 때를 기다렸다. 주변의 호응도 좋아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군사를 일으킬 때가 가까워오자 소(蘇)정승은 가족들을 불러모아 출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며느리가 말하기를 "아버님, 벼 한말을 찧어 쌀 한 말이 나올 때에 출병하여야 성공할 것이니 한번 해보소서"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소정승은 "어찌 벼 한말이 쌀 한말이 되랴마는 네 말이 상서로워 한 번 해보도록 하자"라고 하며 한인을 불러 벼 한말을 찧도록 하였다. 하지만 찧어보니 8되 7홉 뿐이라, 소정승은 하인이 됫박질을 잘못하여 그렇다고 꾸짖고는 다시 찧게 하였더니 9되 7홉이 나왔다. 3홉이 모자라자 며느리를 불러 "어찌 벼 한말로 쌀 한말이 나오겠느냐, 터무니없는 말로 나의 마음을 흩으려 하지 말라"라고 꾸짖고는 출병을 강행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蘇)정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정부에서는 이를 탐지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불시에 공격하여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반란군을 격퇴하였다. 거사가 실패하면서 소(蘇)정승은 역적으로 잡혀 처형당했으며 가족들은 삼족이 멸하는 참화를 겪었다. 관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蘇)씨 집안 종산의 맥을 끊고 묘혈을 파헤쳤는데, 이곳에서 팔다리가 자라지 않은 용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거사의 실패를 아쉬워하며 마을 우물에 무기를 모두 묻고는 병장기를 만들었던 골짜기를 풀무골이라고 불렀다.
민중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모반은 애잔한 한(恨)과 슬픔을 담고 있다. 실패한 모반에 대하여 연민과 슬픔이라니, 그것은 민심이 정권을 부정하고 현실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蘇)씨들이 멸문하고 파묘까지 당한 마을에 조선 후기 광산 김씨가 들어왔다. 그 사이 파묘되었던 소(蘇)씨 묘역도 복원되었다. 요즘에는 후손들이 시제도 모신다고 한다.
■땅이 건조해서 건지미, 북어를 말려서 북어울? 건지미는 소골(우곡)과 오좌동 사이의 마을이다. 몇 년 전 "기차옆에서"라는 이색 카페가 들어선 마을이기도 하다. 건지는 우리말로 "마른 땅"이다. 건지라는 지명의 포인트는 "건"자인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 말은 "마르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한국지명총람이나 송탄시사에도 "땅이 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하고 메말라서 "건지"라고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지형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건지마을은 형세가 여인의 자궁같은 지형에서도 남향을 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지산천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물 걱정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우물은 물론이고, 경지정리가 되기 전에도 물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지=마른 땅"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요인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일한 단서가 둥(동)실봉 너머 "북어울"이라는 지명이다. 북어울은 옛날에 개울 옆으로 북어를 말려서 "북어를 말린 개울"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서 북어를 씻어 말렸다면 햇볕이 잘 드는 "건지미"에는 건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어를 말리는 곳이라는 뜻에서 "건지미(미는 마을 또는 터와 같은 의미)"라고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추측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북어울=북어를 말리던 개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북어울은 그런 의미와 관련이 없다. 북어울은 둥실봉 북쪽 계곡에 흐르는 개울이어서, 건지미에서 불 때 "북쪽 산자락의 여울"이기 때문에 "북여울"이라고 불렸다. 그랬던 것이 북여울> 북어울로 음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건지미=북어를 말리던 곳"이라는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정말 오리무중이다.
건지미는 크게 윗건지미와 아랫건지미(신흥)로 구분되고, 윗건지미는 다시 양달말과 응달말로 나뉜다. 양달말은 햇볕이 잘 들어서 불려진 이름이고 응달말은 그 반대이다. 아랫건지미는 100여 년 전에 형성된 동네이다. 처음에는 오좌동 수성 최씨들이 한 두 집 들어와 살다가 나중에는 전주 이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마을이 신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정부수립 후 행정제도를 개편할 때였다. 작명한 사람은 마을 구장(이장)이었다. 이 사람 생각에는 기왕에 윗 건지미가 있기 때문에 지명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흥"이라고 한 것이다.
아랫건지미 마을은 최근 10년 동안 가장 많이 변한 지역 중 하나다. 마을 앞으로는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섰고 주변에 각종 상가들이 빽빽하다. 마을 사랑방에 마실 오는 노인들도 점차 줄고 있다고 한다.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한 진통이다. ■최자반의 효성이 깃든 오좌동 오좌동은 수성 최씨들이 수 백년을 살아온 마을이다. 평택지방 수성 최씨의 입향조는 세종, 성종 연간에 도화원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최경이다. 최경은 유림과 유용 유항 유근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안양공파와 가산공파 찬성공파 남원공파가 나뉘어졌다.
오좌동을 개척한 이는 모정 최자반이다. 최자반은 안양공 최유림의 손자이고 최윤신의 아들이다. 최유림 이후 수성 최씨 가문은 무인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았고 이후에도 최희효 같은 출중한 무인들이 배출되었지만, 최윤신, 최자반에 의해 문인적 가풍도 함께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최자반은 학문적으로 기묘명현인 최수성, 김정 등과 교유하였고 마을 뒤 둥실봉에 "모정"이라는 누정을 지어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바쳤던 인물이다. 특히 문중설화로 전해지는 시묘살이와 관련된 효성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가문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고 가자. "최자반의 부친은 최윤신이다. 부친이 죽자 최자반은 6년의 시묘살이를 결심하고 묘소 옆에 산막을 지었다. 물도 없는 험한 산 속에서 생활하는 시묘살이는 맹수들의 위협과 극심한 외로움의 나날이었다. 백일이 지날 무렵 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효성이 지극하므로 물을 줄 것이니 아침 저녁으로 정한수를 올리고 기갈을 면하여라"고 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 산신령의 말대로 움막 앞의 땅을 맨손으로 팠더니 맑은 샘물이 솟아올랐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디선가 한 쌍의 학이 날아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최자반의 곁에 머무르며 벗이 되어 주었다. 삼 년 시묘를 살고 다시 삼년상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고 오한이 났다. 불효하는 마음에 통곡을 하다 기진하여 쓰러졌는데 이번에도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지극한 효성을 갸륵히 여겨 희생환을 줄 것이니 시묘를 더울 열심히 하라"라는 말과 함께 환약 3알을 주었다. 이 약을 먹고 6년의 시묘살이를 무사히 마치니 그동안 솟아오르던 물이 메말라버리고 학이 하늘로 비상하며 사라졌다. 그 후 사람들은 학이 노닐며 오동나무 열매를 따먹었다는 봉우리를 "동실봉(오동나무 열매가 있는 봉우리)" 라고 하였다. 시묘살이를 끝낸 뒤 최자반은 오좌동을 개척하고 마을 뒷산에 모정을 짓고는 명유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평생을 보냈다.
문중설화는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가문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약간의 첨삭을 하는 것이 사살이다. 시묘를 살았던 곳이 소골 뒤 부락산 자락이었던 점을 생각할 때 동실봉(둥실봉)의 유래도 앞 뒤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최자반의 인물 됨됨이와 오좌동이라는 마을의 형성과정을 잘 말해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어쩌면 "오좌동"이라는 이름도 "오동나무의 좌측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지산동 지형이 삼태기 같아 좌울, 사당패 흔적이...
««쑥고개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지난 화요일 학교에서 근무 중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내 글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 분은 동막이 고향인 이창우 옹(79세)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수 십 년이나 되었고 중앙부처의 국장을 지내는 등 사회적으로 출세한 분이었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젊은 사람보다 나았다. 이창우 옹은 친절하게도 백현원 터라든가 염봉재의 위치, 태봉산, 남은터 골, 동해울고개, 장고개 같은 옛 지명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나는 이 분의 말씀을 들으며 강호에는 숨은 고수가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이창우 옹에 따르면 내가 밝힌 백현원 터는 위치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본래 백현원은 흰치고개 밑이 아니라 염봉재 남쪽자락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을 옛날사람들은 주막거리, 또는 주막뜰이라고 했으며 자신이 어릴 때만 해도 기와라든가 사금파리가 수북했었노라고 하였다. 주막이 관아가 있던 봉남리에 있지 않고 이 곳에 있었던 것은 진위현 관원들의 텃세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흰치고개는 곱돌이 나오는 석회질이어서 먼발치에서 보면 유난히 희게 보였기 때문에 "흰치"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다가 백현원을 두면서 지명을 한자화하여 흰치=백현(白峴)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는데, 봄이면 고갯마루에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서 참 볼만했다고 회상하였다.
이창우 옹의 주장은 동막입구에 사는 이상진(49세)씨의 증언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이상진 씨는 흰치고개에서 동막을 지나 염봉재와 오룡동으로 갈리지는 대로(大路)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자신의 집자리가 옛 주막자리였다고 주장했다. 이상진 씨와 삼남대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흰치고개 부근 삼남대로가 옛날에는 지금과 다른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분에게는 1950년대 것으로 여겨지는 항공사진이 있었는데, 이 곳에도 산줄기와 다랑이 논을 경계로 옛 길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숯고개인가 쑥고개인가 송탄이라는 지명은 송장면과 탄현면(일탄, 이탄)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송장면에는 장안동, 동령, 이충, 서정과 같은 마을이 있었고, 탄현면에는 좌동, 제역동, 나무내, 구장터, 남월, 오좌울, 건지미, 지산리, 소골, 동막 등이 있었다. 탄현(炭峴)은 우리말로 숯 고개이다.
옛날에는 숯 고개에서 장등리로 이어진 산등성이에 참나무가 많아서 능선을 따라 숯가마가 여러 개 있었는데 숯을 한 짐씩 짊어진 짐꾼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숯 고개라 불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자연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숯 고개"라는 지명이 마을의 이미지를 흐리고 촌스럽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바꿔 부른 것이 "쑥 고개"다.
사실 숯 고개나 쑥 고개 모두 세련된 근대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숯"이 갖는 시커멓고 촌스런 이미지보다는 쑥에서 풍기는 향기롭고 풋풋한 느낌이 마을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논쟁에서 재판관 역할을 한 것은 행정관서였다. 평택시는 쑥 고개보다 숯 고개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상징적인 노력이 흰치고개 중턱에 재현한 숯가마였다. 6. 25전쟁 전까지 숯 고개 주변에는 거의 마을이 없었다. 우리은행과 중앙의원 주변에만 민가가 서너 채 있었고 고개 양쪽에는 참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졌다. 그러던 것이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행정관서와 은행, 시장이 형성되었고, 나중에는 터미널까지 자리잡았다.
평택사람들이 숯 고개 주변을 "국민은행 옆" 또는 "파출소 앞", 아침시장 건너편 등으로 부르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사당패의 흔적이 남아있는 좌울 우리고장의 옛 지명에는 "예좌울", "가재울", "장좌울"처럼 "울"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울"은"울 안", "울 밖"과 같이 공간의 안쪽을 의미하는데, 국가나 마을, 집안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변에서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도 본래 "울(월)"에서 나온 말이고, 수도(首都)의 순수 우리말인 "서울"도 같은 의미였다. 송탄지역에는 '울"과 관련된 오좌울, 남월과 같은 지명이 있고 좌울(월)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 왜 "우(右)울"이라는 지명은 없고 "좌(佐)울"만 있을까?. 지명에서 "좌"라는 명칭은 "오좌울(동)"이나 "가좌울(가재동)", "예좌울(도일동)"처럼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진 지형에서 나타난다. "좌울"도 야트막한 구릉이 삼태기형으로 둘러 처져 있기 때문에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좌울은 안성의 청룡마을처럼 옛 걸립패의 근거지였다. 걸립패는 전문연희패이지만 때때로 마을 두레패가 겨울을 이용하여 걸립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단체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풍물치는 실력만큼은 근동에 최고여서 자부심이 대단했고 혹자는 동령마을 두례패와 견주기도 했다. 좌동으로 불리는 좌울은 송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장육교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개발되기 전 약 40, 50여 호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도 온통 야산과 논밭뿐이어서 아이들이 송북초등학교에 가려면 논 뚝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던 것이 10여 년 전에 산업도로가 건설되고 신도시 개발로 미주, 건영, 현대, 장미, 제일, 쌍용아파트 등이 자리잡으면서 크게 변모하였다. 개발은 거의 완성되었지만 빌딩과 아파트 사이사이에는 아직도 옛 토착민들의 집들이 삐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누더기 같은 루삥지붕에는 주먹만한 돌들이 올려져 있고, 아파트 아래 처연히 남아있는 낡은 기와집 지붕에는 가을햇살에 호박이 빨갛게 익는다. 개발경제의 뒤 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