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장(場)이 섰던 마을이라서 장안동 행정구역으로 송탄동에 속한 장안동은 부락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 주변은 인근의 서정동, 이충동과 함께 10여 년 전부터 신시가지로 개발되고 있어 변화가 많다. 마을 뒤로는 몇 년 전 경문대학과 은혜여자 중, 고등학교가 들어섰고, 동쪽으로는 올해에 한국재활복지대학이 개교하였다. 평택지방에서는 한 마을에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 대학교 두 개가 들어선 메이저 교육타운이 된 셈이다. 얼마 후 동령마을과 경계를 이룬 성재부근까지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나마 남아있던 마을모양도 변하고 지명마저 경문대 입구, 은혜여종고 사거리, 무슨무슨 아파트 삼거리 등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고 마을의 옛 모습과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조선시대 장안동은 지리적 요충에 위치하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소백치(작은 흰치고개) 너머 삼남대로와 이어졌고, 양성현에서 원곡 가천역을 지나 포승면 원정리 괘태곶까지 가는 길이 장안동과 동령을 지나 장당동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 말기 장안동에는 장(場)이 섰다. 송탄시사에 의하면 130여 년 전까지는 장이 섰던 거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경부선 철도가 건설된 후 형성된 서정장만 기억할 뿐 이곳에 장(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장안동은 연안 차씨들이 대성(大姓)을 이룬 마을이다. 연원은 고려말 간의대부를 지냈던 문절공 차원부다. 이 분은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하여 끝까지 출사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 처음부터 차씨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차씨 집안보다 광주 이씨나 파평 윤씨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일제 말 거듭된 흉년으로 마을사람들이 굶주리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비를 털어 도로확장공사와 같은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선행으로 칭송을 받았던 이익래씨나 이용손씨와 같은 광주 이씨 집안 사람들이 마을을 대표했다.
특히 이용손씨의 선행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이 추앙되고 있어 생전인 1940년에 마을 안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으로 비신(碑身)이 크게 파손되자 얼마 전 마을 사람들의 발의로 송탄고등학교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고개아래에 다시 복원되었다
■말발굽이 찍혀 역마바위, 빈대가 많아서 빈대바위 민중은 난세에 변혁을 꿈꾸고 영웅을 기다린다. 이들이 꿈꾸는 영웅은 굴곡지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웅은 반역을 꿈꾸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의로운 도적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19세기 초 홍경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서북지방에서 "아직도 홍경래가 살아 있다느니" "그가 하늘의 군사를 끌고 다시 내려온다"는 등의 루머가 나돌았던 것은 민중들의 염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17세기 중엽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에 평택지방에서 이괄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련의 무리들이 호응을 준비했다던가, 수많은 전설을 남긴 것도 같은 경우다. 민중들은 영웅이 보통사람과 다른 신비한 능력을 한 가지쯤 갖고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산맥의 정기와 풍수지리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만든 영웅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장안동 부락산 줄기 중봉 기슭의 "역마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평택지방에 나타나는 영웅설화 가운데 하나이다. 진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이 임경업 장군 설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면 동부지역은 이괄에 관한 설화가 많은 편인데, 이 이야기도 그와 연관된 것이다. 역마바위에는 말발굽에 깊이 패인 자국이 있다. 사람들은 이 자국이 부락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어떤 장군이 말을 달리다가 부락산에서 중봉으로 뛰어내려 패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부락산에서 중봉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은 되어야 민중을 도탄에서 구하는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장안동 뒤 소골봉 기슭에 대수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이 계곡에 빈대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5백여 년 전 절이 있었고 스님 한 분이 기거하였는데, 이 사람은 염불보다 젯밥에 눈먼 사람이었다. 보다 못한 부처님은 스님을 훈계하기 위하여 바위 뒤에서 빈대가 나오게 하여 스님을 괴롭혔으나 스님은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계하고 말았다. 현덕면 신왕리사지처럼 조선시대 절이 폐사되는 과정에서 빈대가 등장하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볼 때 실제 파계승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불교가 억압받던 시절에 폐사된 절에 관한 구전설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절이 폐사된 뒤에도 바위는 영험하게 섬겨졌으며 바위 옆 나무는 서낭목이 되었다. 바위를 지나 소골봉 정상에 오르면 무속인들이 쌓았다는 돌탑이 있다. `
이 곳은 소골 사람들과 장안동 사람들이 매년 추석에 모여 씨름이나 달맞이놀이를 했던 장소이다. 부락산 줄기에 자리한 마을들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평택시민신문 2002-07-04 (137 호)
장당동 '노루댕이'가 장당동으로… '뒷산이 노루 형상'은 근거 희박
광천마을 엄나무터▷
1. 노루댕이가 장당동으로 중앙동에는 서정동, 이충동, 장당동 같은 법정동이 있다. 이 가운데 장당동은 서정동, 고덕면 율북리 등과 함께 조선시대 양성현 땅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위군에 편입되었고, 1938년 군(郡) 명칭이 바뀌면서 평택군으로, 1980년대 평택군에서 평택시와 송탄시가 분리될 때는 송탄시에 속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1번 국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효명종합고등학교와 대성병원, 장당공단이 자라잡고 있어 오가며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장당동에는 경부선 철길과 서정천, 도일천을 사이에 두고 광천, 장좌울, 노루댕이, 방아다리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장당동이라는 이름은 노루댕이에서 왔다. 그래서 노루댕이 마을을 "원장당"이라고도 하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한자화 하면서 노루 장(獐) 자에 "댕이"와 비슷한 음인 "당(堂)"자를 붙이면서 장당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러면 마을이름이 왜 노루댕이였을까? 송탄시사에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노루형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희박하다. 땅이름 연구가인 배우리 씨는 "노루"라는 이름의 본디말이 "넓은"으로 지역에 따라 "너븐" "노루" "널"로 불려진다고 주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노루댕이는 "두집메"라고 불렸다. "메"는 마을의 다른 이름으로 본래 이 마을에 광주 김씨 두 집만 살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 농장들이 들어오고 6.25전쟁 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마을 규모가 20여 호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씨들도 죄다 각성받이고 오래된 토박이가 적다.
방아다리는 효명종합고등학교 옆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도 몇 집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6.25전쟁 후 규모가 커졌다. "방아다리"는 하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명이다. 평택지방만 해도 칠원동 수촌마을의 본래이름이 "방아거리"였고, 죽백동에도 "방아다리"라는 마을이 있다. "방아다리"라는 지명은 대부분 물레방아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이 마을 옆에도 서정천이 흐르고 있어서 옛날에는 물방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노루댕이에서 광천마을 사이에는 좀은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졌다. 노루댕이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이 길이 서울 가는 1번 국도였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내용이어서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도 20년 전에 이사와서 사람들에게 들었을 뿐 자세히는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장좌울"이다. 장좌울은 마을의 규모나 지형으로 봐서는 노루댕이보다 먼저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가 짧은 마을이다. 이 지명은 좌울이라는 말이 도일동의 여좌울, 가재동의 가좌울처럼 "좌측에 넓게 자리잡은 마을"을 뜻하기 때문에 "장당의 좌측 마을"이라는 뜻에서 불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2.넓은 냇가에 형성되어서 너브내 광천마을은 송탄공단 건너편 광천고가다리 너머에 자리한 마을이다. "광천"은 우리말로 "너부내"인데, "너브"는 "넓은"에서 변형된 음이다. 이 마을은 장당동의 4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1918년 일제가 편찬한 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도 장당리(노루댕이)와 함께 독립된 이름으로 나온다. 너브내는 "띄우지"라고 불렸던 모곡리와 여염리 성머리마을 그리고 서정동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상에 위치했으며, 마을 앞으로는 서정천과 도일천이 지났다.
1970년대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 있기 전만 해도 서정천은 하천 변 배우습지가 매우 넓어서 만조(滿潮)가 되면 "넓은 내"를 이루었다. 넓은 내는 마을 이름도 만들어주었고 조개라든가 자잘한 해산물을 수확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수해와 염해를 가져다주는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아산방조제 건설을 두 손들어 반겼다.
너브내도 장좌울이나 노루댕이처럼 마을의 형성시기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동족마을도 아니며 해방 후 타지 사람들의 이주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초 마을 뒤 도톰안 골에 귀농촌이 형성되면서 외지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도톰안골은 귀농민들이 이주하기 전만 해도 "외집메"로 불렸는데, 마을이 형성된 후 "광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천의 "광(光)"에 귀농촌의 "귀(歸)" 자를 한 글자씩 차용하여 지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서쪽 성머리 마을 사이에는 한뉴목장이 있다. 마을에서 4대를 살아오고 있다는 서정근씨에게 왜 "한뉴"냐고 했더니 1970년대 한국과 뉴질랜드가 합작으로 만든 목장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성머리마을에서 한뉴목장을 끼고 너브내를 지나 노루댕이까지 이어지는 작은 능선은 옛 성터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발행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소개된 방축리 성터가 이것으로 판단되는데, 원형이나 방형과 같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궁금증을 일으킨다. 마을 입구에는 5백년이 넘는 엄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당집도 없는 마을에서 신령스런 당목(堂木)으로 섬김을 받았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쬘 때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으며, 오월 단오에는 그네를 뛰는 놀이공간이었다. 신령한 나무이다 보니 일광천 전설이라는 신비한 전설도 전해주었다. 주민 서정근 씨도 마을에서 엄나무에 그네 매는 것으로는 자신이 최고였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나무다.
그런데 20여 년 전부터 마을 당제(堂祭)가 중단되더니 몇 년 전에는 마을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나무 전체가 크게 화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5백년을 버텨온 끈기로 2, 3년을 더 버텼는데 작년에 큰 가지가 부러지면서 무너져 내렸다. 질퍽대는 산길을 걸어 찾아간 나무둥치에는 풀만 무성하고 옆에 잘라놓은 등걸은 피 빛으로 붉다.
어느 누구의 솜씨인지 흔적이 희미한 잉걸 옆에 상석을 마련하고 제를 올린 흔적이 있다. 당목(堂木)은 죽었어도 사람의 마음은 당신(堂神) 곁을 떠나지 못하는가 보다. - 평택시민신문 기자 2002-07-27 (140 호)
서정동 천주교 박해속 신자들이 일군 옹기점, 점촌엔 옹기가마 안보이고...
송탄출장소 앞▷
■우물도 없는 곳에 우물지명이 있다 서정동과 중앙동, 장당동 지역은 조선시대 양성현 땅이었다. 양성현은 읍내(동항), 반제, 구룡동면, 영통면 외에도 원곡에서 원도일 마을을 거쳐 장안, 서정, 동청, 한산리를 지나 포승면 원정리 괴태곶봉수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 지역이 평택지방에 편입된 시기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다.
서정동이라는 지명은 서둔물에서 왔다. 앞서 말했지만 서둔물은 중앙동 서정초등학교 북동쪽 마을로 좋은 우물이 세 개나 있었다. 이 마을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정착하고 미군부대에 의지해서 먹고살려는 사람들이 복창동, 사거리, 신창리, 신장동 등에 모여들면서 마을이 커지자 1981년 송탄시 출범과 함께 서정동과 중앙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마을이 커지고 인구가 증가하면 행정편의를 고려하여 분동(分洞)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분동(分洞)으로 지역의 역사성이 훼손되거나 문화적 정체성이 무시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서정동의 분동은 이 같은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에 따른 분동이어서 서정동이라는 지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서둔물이 중앙동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같은 조처로 서정동은 "서정(西井)"이라는 마을과 우물이 없는 정체불명의 지명이 되었다.
청북고가도로는 중앙동과 서정동을 나누는 경계 구실을 한다. 서정동은 고가도로 북쪽의 점촌, 복창동, 지장동, 신창리, 절골, 사거리, 적봉리를 말한다. 이 가운데 본래부터 있던 마을은 점촌과 적봉리다. 그나마 점촌마을은 1920년대 초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고, 옛부터 살아왔던 마을은 적봉리 뿐이었다. 하지만 적봉리도 본래 송탄지역이 아니라 고덕면에 속한 마을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부터 1백년 전까지 지금의 서정동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이 없을 때 이 곳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울창했던 야산과 논밭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던, 어쩌면 사람이 살지 못했던 이 땅에 마을이 이뤄진 것은 6. 25전쟁과 미군부대 주둔이 있고 난 뒤였다.
■낮은 자리에 살던 사람들 해방 후 처음 서정동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황해도 피난민들이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신흥교회 뒤 신창동이었다. 신창동은 숯고개 위쪽, 적봉리와 장등리, 금각리로 이어지는 산등성이 아래 마을이다.
좀 내려가면 평탄지대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논밭이어서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이 마을은 지금도 황해도촌으로 불린다. 아직도 황해도 도민회가 큰 힘을 발휘하며 주민들 사이의 연대의식도 끈끈하다.
사거리와 복창동은 피난민과 미군부대에 기대살기 위해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뒤섞인 마을이다. 사거리라는 이름은 적봉리 근처 산등성이에 부대정문, 적봉리, 황구지리, 갈평 방향으로 갈라지는 네거리가 형성되면서 유래되었다.
복창동이라는 지명은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다. 일설에는 "복(福)이 날로 창성하라"는 뜻에서 불려졌다고 하지만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보다는 한 때 미군부대의 청소용역을 대행하는 "복창공사"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복창동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대부분 남한사람들이었지만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생활이 빈궁했다. 그래서 마을은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 많았으며 양계장이나 고물상, 똥구덩이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80, 90년대 도시개발로 주택이 개량되고 도로가 정비되면서 지금은 깨끗한 마을로 변모되었다.
절골은 신창과 복창동 사이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약수암이라는 절이 있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점촌(店村)은 송탄소방서 뒤쪽 마을이다. 이 같은 이름은 전국 어디서나 발견되는 흔한 지명으로 어느 것을 막론하고 수공업자촌을 의미한다. 평택과 안성지역 대부분의 점촌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피신했던 신자들이 일군 옹기점이다.
서정동 점촌도 옹기점인데 처음 가마를 만들고 정착한 사람은 1920년대에 들어온 황금석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후 옹기장이들이 많아지면서 가마가 여러 개로 늘어났으며 나중에는 구워낸 옹기가 산을 이룰 정도로 발전하였다. 점촌에는 옹기점은 많았지만 민가는 몇 집 안되었다. 그나마 90년대를 전후하여 옹기산업이 쇠퇴하고 도시확장으로 연립주택과 빌딩이 들어서면서 옹기가마와 민가들이 사라져 이제는 점촌로라는 지명과 점촌식당으로 만 옛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