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去는 이미 흘러갔다. 그러나 歷史(혼,얼)는 죽어버린 化石이 아니라 살아 있는 生物이다. 과거의 經驗들은 燦爛하면 찬란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우리에게 有益하게 작용 할 수 있다. 다만 그 유익함은 과거를 正確히 認識하여, 거기에 비추어 來日을 읽어낼 줄 아는 個人이나 社會만이 누릴 수 있을 터이다.“
‘1614년 영창대군의 나이 9세 때 이이첨 일파가 權力에 눈이 어두워 人倫을 저버리고 왕대비를 모함하고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시켜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게 하니 펄펄 끊는 방 안에서 어린 대군은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고 말았다 孤松公 崔纘(1554~1624)은 그 비통한 소식을 羅州鄕校에서 전해 듣고 이때부터 세상일과 단절하고 스스로 雅號를 孤松이라 하였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늘 푸름을 간직한 외로운 소나무처럼 義理와 貞節을 상징’하듯 孤松公 최찬은 文鄕의 고장 나주 寶山精舍 八賢의 한 사람인 三州公(禮曹佐郞)최희열의 長男이며 壬亂의 名將 武肅公(一等功臣) 최희량 將軍의 친 조카이다.
孤松公은 羅州의 셋고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엄격하여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는 어긋난 일을 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고 하며 늘 學者之向의 삶을 살아온 진정 잊혀져서는 안될 큰 사람이다. 공의 살아온 길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光海君의 시대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자식이 어머니를 감금하는 悖倫이 벌어졌을 때, 일부
이를 지적하다 유배를 가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대부분은 그 삼엄한 정국에 숨을 죽였다
그러나 고송공은 이를 좌시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이러한 행위의 부당성을 詩作活動(著書: 애대군가, 운전가, 고송유고)을 통해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그 대가는 컸다. 戊午士禍를 일으킨 이극돈의 후손인 이이첨의 誣告로 자신은 6년의 세월 동안 囹圄의 몸이 되어야 했으며, 母親을 이 기간에 세상에서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一身의 苦難이야 감내한다손 치더라도 모친의 임종을 지켜내지 못한 恨이 어떠했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이 처럼 치열하게 살았던 고송공의 개인사는 우리의 소중한 귀감이며 憂國精神과 孝悌文學史에 길이 남을 진실한 교훈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떠나는 존재이다. ‘곧은 道는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워서 단지 먼 훗날을 기약할 뿐이다’ 그러나 善行과 惡行은 길이 남는다.
고송공이 살다간 조선시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공존하라 ! 그것만이 서로 사는 길이다.”라고....... !!
고향 나주에서 눌러 살아 온지 어언 70여 성상이 지났다. 고향에서의 노년을 쓸모와 보람을 찾는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에 ‘작은도서관’과 ‘향토문화연구회’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에서 빛바랜 한권의 고서(고송공문집)를 발견하였고
이를 세상에 내 보이고자 하였다. 이 때 흔쾌히 번역을 맡아주신 성균관 대학 이영호 박사님
그리고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000” 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