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성(隋城)이다. 시조 영규(永奎)의 5세손이다. 조선조 출사해 司正을 지냈다. 그의 아들 유림이 정충적개 공신이 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임명되고 수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안양(安讓)이이라는 시호를 받고 수성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평택 수성최씨의 입향조이다.묘는 평택시 도일동 산10 번지에 있고 석상과 비석 등이 있다.
최유림 (崔有臨) 1426 ~ 1471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자앙(子昻)이다. 시조 영규(永奎)의 6세 손이다.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세조 즉위에 공이 있어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이 되었다. 1464년 충주원 부사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5년 수군처치사가로 나갔다. 앞서 명나라에 갔을 때 사무역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벼슬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충청도 병 1000명을 이끌고 석장현(石場峴) 싸움에서 적장 김말손(金末孫)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이 되고 오위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수성군(隋城君)에 봉하여 졌다. 그 해 겨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증직은 자헌내부 병조판서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묘소는 지산동 의곡 106번지에 있다.
※ 묘 및 사원은 평택시 향토유적 제 4호로 지정받았다.
최 유 용(崔 有容)
본관은 수성이다. 초선 초 무신. 최경의 차남으로 무과에 급제해 태천 군수, 가산 군수를 지냈다
贈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받았다. 평택시 도일동 여좌울에 정부인과 합장했다, 비석과 상석이 있다.
최 윤종 (崔 潤宗)
본관은 수성이다. 최언호의 부친이다. 사산 감역을 지냈으며 사후 嘉善大夫 戶曹參判 겸同知義禁府事를 증직받았다. 부인은 貞夫人이시다. 묘는 가재동 방여울에 비석과 상석이 전한다.
최언호(崔 彦浩)
본관은 수성이다
직장(直長)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고, 1537년(중종 33)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으며, 1545년(명종 즉위)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3등에 봉해졌으며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1547년(명종 2) 종4품 하계인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을 거쳐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이 되었다. 1549년에는 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가 되었다. 1551년(명종 6) 내승(內乘)이 되었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최 언식 (崔 彦 湜)
從仕郞 通禮院 引儀
墓 포승면 도곡리 무수리쌍봉.비석과 석물 ,상석이 있음
최 광규( 崔 光 圭)
字 文 應. 통훈 대부. 내자사직장. 첨지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墓 포승면 도곡리 무수리쌍봉
최 창후 ( 崔 昌後)
선무랑 무과 급제. 통훈대부, 군자감 주부.
숙부인 진주 강씨와 포승면 도곡리 무수리 합장
최 윤신 (崔潤身)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유학자이다.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극기재(克己齋)이다. 아버지는 유림(有臨)이다. 1469년(예종 1년) 기축증광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1477년 의금부경력 1480년 도사에 이어 1483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내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둔옹(成遯翁), 안사재(安思齋) 등의 유학자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이후 진위현 관사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중직은 통정대부 이조참의이며 묘소는 지산동 산106-2에 있다.
최자반 (崔子泮)
생몰년 미상. 최영규 8세손,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망고(望皐). 최윤신의 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강직하여 많은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학문을 좋아해서 김모재(金摹齋)와 안국(安國)형제 그리고 백휴암(白休庵) 등 인걸과 교분하면서 지고한 학문을 닦았다. 강릉최씨 진위파의 최수성(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진위현은 외가)과, 평택지역의 조광조, 우남양 등과도 교류하였다고 한다. 산수와 자연을 벗 삼으며 조정의 벼슬을 마다하고 부모님 봉양에 진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부친상을 당하여 진위현 우곡동에 산소를 모시고, 시묘막을 지어 그곳에서 시묘살이를 6년 동안 하였는데 기이한 징조가 많았다고 한다. “첫째는 우막 앞에 샘물이 용출하였는데 샘을 파니 샘물이 용출하였고, 둘째는 그가 한질(寒疾)이 나는데 꿈 중에 한 노인이 환약 3개를 주어 그것을 복용하고 효험을 보았고, 셋째는 우막 근처에 뱀과 개미가 아주 많이 서식하였는데 그가 시묘하는 중에는 전혀 접근치 않아 신통하였고, 넷째로는 우막 근처에 학 한 쌍이 오래된 소나무에 소식하고 있었는데 그가 상을 마치고 귀가한 이후에 그 학도 슬피 울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동리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낳은 대효자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그는 나무를 사랑하여 은행목과 향나무 그리고 팽이나무 등 수십 주를 생전에 식수하였는데 6.25 전쟁의 폭격으로 거의 고사되고 지금은 은행목 2주와 향나무 2주가 성장하여 큰 거목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의 후손들이 철저하게 보존, 관리해 고 있다고 한다. 사후에 가선대주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제수되었다. 그의 묘소는 독곡동 산44번지 쌍분이다.
최희효 (崔希孝) 1509 ~ 1589
조선 중기 무인이다.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자는 언순(彦順)이다. 자반(子泮)의 아들이다. 재덕을 겸비하였고 특히 문학에 탁월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531년(중종 26) 무과에 급제 정주판관이 되었으며 1540년 광주판관 1543년 선천판관, 1545년 예조예빈 사부정을 지냈다. 1546년 창성부사(昌城府使), 1549년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53년 이후 수군으로 나가 민포진첨사, 경상좌 수사를 거쳐 1557년 전라 좌수사가 되었다. 재임시 왜선 3척 왜인 200여명을 생포한 공으로 지하를 받았으며, 1559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65년(명조 20) 동지사 김억령(金億齡)을 따라 명나라에 갔을 때 무관이라고 업신여기던 명의 대신들은 탁월한 문장과 덕행으로 누르고 돌아왔다고 하여 명종이 기뻐하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제수하였다. 1566년 가선대부 회령부사가 되었고 1573년 해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돌연 병을 얻어 낙향하여 진위현 탄현면 오좌동(현재 독곡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589년(선조 22)에 별세하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크게 슬퍼하고 권율을 예관으로 보내어 장례를 극진히 치르게 하였다. 묘소는 도곡동 산44번지 선영에 있다.
최언호 (崔彦浩) 1506.11.26 ~ 1566.10.24
조선중기문신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자는 호연(浩然)이다. 윤종(潤宗)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 대과에 급제하였다. 직장과 충훈부도사를 역임하였고 15367년(중종 33) 충순위에 들어갔으며 1545년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원종공신 3등으로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에 봉해졌으며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 1547년 종4품인 조봉대우 선공감첨정을 거쳐 충훈부 경력이 되었다. 1549년 수원 도호부사가 되었다. 1551년(명조 6)되었으며 병조참의, 동부승지, 한성부판윤, 안동부사를 지냈다. 1566년 졸하였다.
묘는 평택시 가재동 산53번지에 있으며 가재동 산39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최 창후( 崔 昌後)
무과 급제, 선무랑, 군자감 주부 . 증 통훈대부
평택시 포승면 도곡리 선영 합장
최 상 충 ( 崔 尙忠 )
字 蓋卿.가선대부 동중추 부사
부인 원주 원씨 정부인. 묘소는 송탄시 가재동 방여울에 있다
최 천성 (崔 天成 )
字 時哉 통정대부 절충장군 行 용호위 부호군
숙부인 오씨와 원도곡 753번지에 합장
최보한(崔 輔 漢)(1489~ 1546 명종1년)
본관 수성(隋城). 자는 언경(彦卿). 경(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항(有恒)이고, 아버지는 윤명(潤明)이며, 어머니는 이의석(李宜碩)의 딸이다.자 언경(彦卿).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1538년 직제학(直提學)에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 1542년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이조 ·예조의 참판, 1544년 중종이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에 가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수산군(隨山君)에 봉해졌다. 1546년 이조판서, 이어 우참찬이 되었다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1527년 이문전시(吏文殿試)에 급제한 뒤 문반으로 직을 옮겼다. 1533년 사간원정원이 되었는데 이때에 당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試)에서 차석을 하여 왕으로부터 조궁(造弓)을 받았다.
1537년 지평·사간원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응교·전한·사인(舍人)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대사간 등 삼사의 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거쳐 1541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었을 때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자 대신에게 찾아가 수척한 몸으로 3년상을 견디어낼 수 없다고 정강이뼈까지 내보이며 사정하여 교체되었는데,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백인걸(白仁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1533년 사간원 정원이 되었는데 이때 당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詩)에서 차석을 하여 왕으로부터 조궁(造宮)을 하사받았다. 1535년 지평, 1537년 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이어 응교, 전한, 사인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 승지 1540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사간원 대사관, 한성부우윤, 형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을 거쳐 1543년에는 이조참판,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의 족질로서 대윤(大尹) 일당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추성협익 정난위사 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수산군에 봉하여 졌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1546년에는 우찬성으로 승직되었으며 1546년(명종 1)에 졸하였다. 묘는 평택시 도일동 110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