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요, 기점이 되는 몇 대조나, 몇 세손의 조(祖) 와 손(孫)이 붙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아도 타당하고 우 리 역사상 고문헌에 아무런 혼란 없이 써온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묘제 축문에는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① 六世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② 五世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③ 五世孫○○ 敢昭告于 顯五世祖考...
④ 五代孫○○ 敢昭告于 顯五代祖考...
⑤ 後孫○○ 敢昭告于 顯先祖考...
위의 보기에서 ①은 한갑수식 발상으로 아예 말이 안 된다.
②, ③, ④는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②는 내리 계산할 때는 ○世孫, 위로 계산할 때는 ○代祖라는 관례를 살려서 사용한 것이다. ③은 모두 ○世孫, ○世祖를 사용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④는 내리 계산할 때도 ○代孫, 위로 계산할 때에도 ○代祖라 한 것인데 이것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⑤는 이런 번거로운 것을 다 버리고 오대조(五代祖) 이상은 모두 선조라 쓰고 그 후손은 모 두 후손이라고 쓰는 것이다.
이는 우암(尤菴) 후손들과 노론계열에서 쓰는 예이다.
즉 서인 계열에서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②나 ④의 예문을 많이 사용하므로 대중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이 세(世)와 대(代)에 대해서 필자의 족질(族姪) 이성형(李星衡)이 의문을 가지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원론적인 것만 대충 말해 주었더니, 그는 이것을 더 발전시켜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대부분 이를 시인하려 들지 않더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들이야 믿든지, 말든지 더 이상 설득하려 들지 말고 과거 우리 역사상 쓰인 사례만 조사하여 보이고 더 이상 논란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후에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세(世)와 대(代)》라는 조그만 책자를 만들어 성균관을 위시해서 전국 유명 도서관에 기증했고, 인터넷으로도 서원, 향교, 전례원, 각문중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렸더니 그 사례를 보고서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남규(李南珪, 철종6 1855~1907)선생은 경헌공을 모신 구봉사(龜峰祠) 중수기문을 쓰면서 경헌공의 8세손 성호 이익이라고 했다.
이남규선생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한말 의사(義士)인 동시에 유학자이다. 이런 분이 성호선생의 가계와 대수를 잘못 알고 썼을 리가 없으며 설령 잘못 알고 썼더라도 그 후손들은 그것을 모르고 이 기문을 내걸 리가 없다.
또 공자를 모신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학행(學行)과 덕망을 겸비한 사람이 별세하면 국가의 논의를 거쳐 이 문묘에 종사(從祀)했는데 이를 승무(陞廡)라 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승무된 사람은 18현(賢)이다.
우리 역사상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유학자가 18명인 셈이다.
이성형은 그의 《세(世)와 대(代)》란 책에서 이 18현의 후손들이 몇 대조, 몇 대(세)손이라 쓴 사례를 권태현(權兌鉉)님이 조사한 표를 인용하여 모두 예시하여 보였다. 그 결과는 물론 위의 이남규선생이 쓴 예와 같았다.
이처럼 논리적인 측면이나 역사적인 사실이 명확한데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다니 한심스럽다.더 나아가 오히려 과거의 것이 수리상(數理上)으로 보아 잘못되었으니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란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논리와 실례를 이해하면 이런 의문이 풀릴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논리가 정연하고 역사적으로 아무 혼란 없이 써 오던 것을 지금 와서 왈가왈부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금까지 4대봉제사라 하면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이르는데, 나를 1대로 잡아야 한다는 사람의 주장을 따르면 고조까지의 제사를 5대봉제사라 해야 한다. 이 무슨 망발인가?